오피니언 중앙시평

‘우리 것’이 없는 설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비록 절반의 성공으로 끝났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우주발사체 나로호 발사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 주었다. 기술적인 면만 보더라도 우주기술 강국인 러시아와의 공동 작업을 통해 우리가 얻은 우주 개발에 대한 지식과 경험은 상당하고, 이러한 자산은 앞으로 독자적인 기술을 개발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이 같은 측면 이외에 온 국민이 나로호 발사 과정을 상당한 기간 동안 지켜보면서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도 많이 변화했음을 느낀다. 우선 한 국가의 과학기술 수준이 국가의 위상을 좌우할 수 있음을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러기에 몇 번의 발사 연기에도 불구하고 국민들은 꾸준히 연구진을 성원해 주었을 것이다. 또한 한쪽 페어링 분리 실패로 위성이 궤도 진입을 못한 것으로 밝혀진 뒤에도, 많은 사람이 관계자들을 질책하기보다 오히려 격려하는 태도를 보여 이제 우리도 성실히 일했다면 실패도 용인할 만큼 의식이 성숙했음을 보여 주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무려 7번에 걸쳐 발사를 연기한 것은 우리를 실망시키고 답답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특히 그 이유가 주로 핵심 기술을 가지고 있는 러시아 측의 일방적인 통고에 의한 것이었음이 밝혀지면서 자존심 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러한 일은 독자적 핵심 기술이 없는 기술 약소국이 종종 겪는 설움이다. 특히 여러 나라 기업들이 생사를 걸고 경쟁하는 산업 현장에서는 거의 매일 일어나는 일이다. 예를 들어 과거 노트북 모니터로 쓰이는 LCD 생산을 일본이 독점하고 있었을 때, 한국 전자회사들이 생산하는 노트북 컴퓨터 대수는 일본 LCD 모니터 회사가 공급해주는 물량에 따라 결정되었다. 또한 CDMA 기술을 이용하는 우리나라 휴대전화 가격의 상당 부분이 원천특허를 가진 미국 퀄컴사에 지불되는 특허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처럼 핵심적인 기술이나 부품 생산 능력을 가지지 못하면 많은 제약과 손해를 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개별 부품이나 특허보다 더욱 중요하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는 것은 국제적인 기술표준이다. 국제기술표준이란 새로운 제품을 만들거나 서비스를 제공할 때 국제적으로 지켜야 할 규칙을 말한다. 예를 들어 한국에서 쓰던 휴대전화를 미국에서도 쓸 수 있으려면 같은 방식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두 나라가 공통적인 규칙을 정하고 모든 제품을 이에 맞추는 것이다. 이러한 국제기술표준은 세계화가 심화되고 사람과 물자가 국경을 넘어 이동하는 경우가 많아지면서 점점 더 중요해지고 있다. 특히 자기 나라의 기술이 국제표준으로 채택되면 특허료도 받고 신제품 개발과 생산에도 유리하기 때문에 모든 선진국이 큰 관심을 쏟고 있는 분야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과거 선진국들이 정한 국제기술표준에 맞추어 제품을 생산하는 데 급급했다. 이제 겨우 IT 산업을 중심으로 국제표준을 결정하는 과정에 참여하기 시작하였지만 아직도 독자 기술력이 부족하고 국제무대에서의 발언권이 약해서 ‘못 가진 자’의 설움을 당할 때가 많다.

이처럼 ‘우리 기술’이 없고 ‘우리식 표준’이 없으면 국제무대에서 설움 받고 손해 보기 십상이다. 그러나 거시적으로 볼 때 더 큰 문제는 ‘우리의 학문’이 없고 ‘우리식 담론’이 없는 점이라고 생각된다. 최근 한국이 당면한 문제 중에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대응, 국제적 경제위기에 대한 대처, 새로운 세계 무역질서 확립 등 국제적으로 연결된 사안이 많다. 하지만 이 문제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분석하고 우리 입장을 대변할 수 있는 이론적 틀이 없어서 국제사회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선진국의 논리에 끌려가고 있다. 중국은 일찍이 이러한 문제점을 간파하여 ‘경제대국을 넘어 사상과 이론의 대국으로’라는 모토를 내걸고 중국식 담론으로 국제사회의 여론을 주도하기 위해 올해 3월 ‘중국국제경제교류중심’을 설립하는 등 대규모 싱크탱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다행히 한국에서도 우리 사회과학이 그동안 너무 외국 이론에만 의존하여 한국 사회 발전에 대한 독자적인 분석이나 대안 제시에 미흡했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최근 사회과학계에서 나오고 있다. 늦었지만 우리도 과학기술의 발전과 함께 인문·사회과학 분야를 지원해 ‘우리의 이론’ ‘우리식 담론’을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것이 시급하다. 그렇지 못하면 중국의 인민일보가 개탄하였듯이 “경제에서는 대미 흑자가 쌓여 가지만 사상과 이론 측면에서는 적자투성이”인 상태가 지속될 것이다.

오세정 서울대 교수· 물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