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칼럼] 북한을 '왕따'로 몰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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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 시골 청년이 도회지로 일자리를 찾아 떠났다.

따뜻한 봄날 길을 걷던 청년은 졸음에 겨워 길섶 언덕에서 낮잠을 잔다.

동네 부잣집 딸이 지나다 준수한 청년의 잠든 모습에 반한다.

청년과 백년해로를 상상하다 인기척에 놀라 자리를 피한다.잠시 뒤 강도가 지나다 청년의 봇짐에 눈독을 들이고 칼을 겨누며 접근한다.

봇짐을 풀어 본 순간 실망한 강도는 칼을 거두고 자리를 뜬다.

한숨 자고 난 청년은 자신에게 닥쳤던 행운도 액운도 알지 못한 채 다시 길을 걷는다.

너새니얼 호손의 '데이비드 스완' 이라는 단편소설 내용이다.

개인사든 국가사든 자신도 모른 채 지나치는 불가측의 위험과 행운이란 있을 수 있다.

94년 북한 핵이 국제적 문제로 떠올랐을 때, 한반도 위기상황이 얼마나 심각했던지를 당사자인 우리는 모르고 지나쳤다.

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윌리엄 페리는 그의 공저 '예방적 방위' 4장에서 긴박했던 그때 상황을 전하고 있다.

당시 미 국방부로선 북한이 몇 개월 안에 5~6개 핵폭탄 제조가 가능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제거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핵시설 공격과 미군 증파 등 대응방안을 클린턴 대통령 주재의 국가안보위에 보고한다.

선택을 몇 분 남겨 놓고 있는 순간, 평양을 방문 중인 카터 전대통령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김일성 (金日成) 주석이 협상 제안을 했다는 보고였다.

이로써 전쟁 위기상황을 넘기고 북한핵문제는 제네바 합의로 끝나게 된다.

유사한 위기상황이 지금도 끝난 게 아니다.

페리 조정관 방한으로 대북정책의 한.미간 공조체제가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각론 부분에서 이견 (異見) 은 그대로 남아 있다.

북한이 사찰을 거부하거나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지 않을 경우의 대응에 대해선 한.미간 이견은 계속될 것이다.

한.미간 대북정책의 차이일 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에서도 이에 대한 불안과 불만은 그대로 남게 된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결론부터 말한다면 나는 적어도 햇볕정책이 상당기간 지속돼야만 대북정책에 대한 우리의 방향이 선다고 판단한다.

대체로 사람들은 햇볕정책을 화해와 협력으로 대표되는 유화정책으로만 보고 있다.

물론 방어적이고 유화적인 접근이긴 하지만 우리로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공격적 대북정책이 햇볕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군사적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봉쇄정책이나 화해 협력을 시도하는 햇볕정책이나 전쟁억지라는 측면에선 똑같은 목적성을 지닌다.

아니 전쟁억지 측면에서는 봉쇄보다는 햇볕이 더욱 적극적이고 실현성이 높다고 본다.

군사적 방벽은 쌓기 쉽다.

그러나 문제해결엔 도움이 안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만약 망하는 북한을 지켜보면 됐지 우리가 무엇이 아쉬워 교류와 협력을 애타게 자청하느냐, 밤낮 문제를 일으키는 문제아를 '왕따' 로 고립.봉쇄시키는 강한 채찍을 들지 않고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시각으로 볼 때 어떤 결과가 예상될까. 협상을 거부했다고 당장 미국이 북한을 선제공격할 수는 없을 것이다.

미군을 증파하고 미.일간 군사동맹을 강화하며 전역 (戰域) 미사일방어 (TMD) 체제로 북한을 압박할 수 있다.

TMD체제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쪽이 러시아와 중국이다.

특히 중국은 북한과 오랜 우호관계로 해마다 옥수수.원유.코크스를 지원하고 있다.

이런 양국관계가 군사적 위협을 동시에 느낄 때 더욱 긴밀한 군사동맹으로 기울면서 한반도엔 미.일과 러.중의 군사적 긴장관계가 팽팽히 맞서고 동북아 정세는 우리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갈 수 있다.

이래도 좋은가.

낮잠 자며 제 운명의 갈림길조차 모른 채 지나기보다는 정면으로 맞서 문제를 푸는 햇볕정책이 더 적극적이고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

이제 막 1년째다.

이마저 참지 못하고 응징과 채찍을 들고 나온다면 그나마 기울인 노력도 물거품이 된다.

물론 햇볕정책의 치명적 약점이 북이 변치 않을 경우 대안이 없다는 점이다.

일종의 시간 싸움이다.

북의 변화를 더 기다릴 것인가.

빨리 손볼 것인가.

그러나 노력하지 않고 최악의 사태를 미리 상정할 필요가 있는가.

있다면 채찍을 드는 악역 (bad guy) 을 미국이 맡는 한.미간 정책조율과 역할분담이 필요하다.

이 점을 줄기차게 미국과 논의하고 설득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북한을 '왕따' 로 몰지 않고 대화와 화해의 국면으로 맞아들일 것인가.

미국과 한국, 보수와 진보가 함께 생각해야 할 대북정책의 기본골격이다.

권영빈 논설위원 겸 통일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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