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홍구 칼럼

역사의 정치화가 문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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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올 광복절은 많은 국민에게 다시금 우리 역사를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하는 국경일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으로 비롯된 위기감이 작용한 결과일 듯싶다. '역사를 잊고 사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 는 경구를 생각할 때 이렇듯 역사에 대한 국민의 관심이 많아졌다는 사실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 되살아난 이데올로기의 망령

지난 세기 냉전의 막이 내리면서 우리는 종교전쟁과 이데올로기의 갈등 시대가 지나갈지 모른다는 낙관론에 기대보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꿈은 한낱 환상일 뿐 9.11사태에 의해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오늘날 이라크를 비롯한 중동지역에서의 혈투는 다분히 종교전쟁의 요소를 내포하고 있음을 부인할 사람은 없다. 한편 이데올로기, 특히 민족주의가 지닌 잠재적 폭발성을 수면 아래로 계속 제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동북아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련의 사태들이 실증하고 있지 않은가. 한마디로 불안정과 불안의 시대는 계속되고 있다.

일전에 지적했던 바대로 동북아시아에서는 지난 십여년 동안 비교적 평온한 국제환경이 유지돼 왔다. 이러한 지역적 평온은 개방화를 시작한 중국이 시장경제체제를 수용하고 경제발전에 최우선 순위를 부여한 결과였다. 경제의 원리와 논리가 정치적 갈등을 예방하는 다행스러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망령(亡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고 있다. 지난 20세기를 돌아보면 천황의 신격화를 앞세운 일본의 극단적 군국주의가 얼마나 가공할 만한 피해를 가져왔었는지, 그리고 중국의 문화혁명과 홍위병의 물결이 얼마나 소름끼치는 공포의 시대를 창출했었는지를 우리의 기억에서 쉽게 지워버릴 수 없다. 바로 그러한 이데올로기의 망령을 어떻게 통제하느냐가 동북아의 미래, 그리고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좌우하는 열쇠가 될 것이다.

역사란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나 기억이 아니다. 역사란 사실에 대한 인식의 결과이며, 따라서 시간이 흐르고 세대가 바뀌면서 끊임없는 선택과 재창조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누가, 무엇을, 어떻게 재창조할 것인가. 이에 대한 선택은 다분히 정치적 선택이 될 수 있고 그 결과는 역사의 정치화인 것이다. 특히 국가나 집권세력이 정치적 목적의 대중동원을 위한 상징조작의 수단으로 역사를 이용할 때 가장 위험한 사태가 벌어지는 것을 우리는 동서양의 현대사에서 여러 번 목격했다. 이러한 불행한 사태를 예방하는 역사의 교훈이 있다면 다음 두개의 원칙을 수용하고 집행하는 것이다.

첫째, 국가나 정치권은 역사의 해석이나 인식의 일차적 주역이 되는 것을 극구 삼가야 한다. 둘째, 정치이념의 교조화를 항시 경계해야 한다. 교조주의로 흐른 민족주의나 개혁주의는 오히려 민족의 위상과 이익을 손상시키며 개혁의 효과를 기다리는 어려운 계층의 생활을 더욱 힘들게 하기에 이와 같은 '교조화의 함정'은 피해야만 한다.

상대적으로 강대한 나라들 사이에 위치한 우리의 지정학적 한계를 역사인식의 차원에서도 항시 유의해야 한다. 우리보다 큰 이웃나라들이 다시 민족주의나 국가주의적 정치이념으로 역사를 재창조하고 국민을 동원하는 정치적 선택을 하게 된다면 동아시아에는 새로운 긴장이 고조될 것이고 그 가운데서 상대적으로 우리가 가장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될 것이다. '하나의 중국'이나 '강력한 일본' 같은 상징적 표현은 언제나 잠재적 인화성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상황의 악화를 예방하고 우리의 안전을 도모하며 공존공영(共存共榮)하는 동아시아 지역사회로 전진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 것인가.

*** 정치이념의 교조화 경계해야

우선 과도한 흥분은 절대금물이다. 흥분이 나라의 힘이 되는 것도 아니고 남을 견제하는 수단이 되는 것도 아니다. 흥분이나 강경대응보다 냉철함과 지혜로움을 견지할 때 우리의 입지는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그리고 일본과 중국보다 바로 우리가 이데올로기시대에 대한 향수를 말끔히 씻어버리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자임하고 나서야 한다. 도식화된 이념이나 해묵은 원한은 빨리 털어낼수록 우리의 체질을 강화할 수 있다. 이렇듯 교조주의에서 해방된 인간중심, 공동체중심의 역사인식은 우리의 이웃에까지 평정(平靜)을 전파할 것이다.

이흥구 중앙일보 고문·전 국무총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