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희 대기자의 투데이] '햇볕'의 운명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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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미국의 대북 (對北) 정책 방향을 좌우할 페리 보고서는 참으로 까다로운 조건 속에 준비되고 있다.

그것은 클린턴 행정부 정책에 대한 의회의 철저한 불신을 해소하는 일이다.

특히 상원과 하원 공화당 소속 의원들은 클린턴 외교의 대표적 업적으로 알려진 94년의 북.미 제네바 합의는 속임수요, 실패작이란 인식을 갖고 있다.

보수적 성향의 윌리엄 페리를 대북정책 조정관으로 임명한 것 자체가 의회 달래기의 일환이다.

페리 보고서의 내용은 이렇게 처음부터 정치적 제약을 받고 있다.

의회가 행정부의 대북정책에 제동을 거는 한 북한에 줄 당근을 마련할 수 없다.

대북정책은 기본적으로 달러외교다.

한국 정부는 9일 서울을 방문한 페리가 우리의 햇볕정책이라는 큰 틀과, 포괄적 접근이라는 방식을 납득하고 떠났고, 따라서 그의 보고서에는 우리의 기본입장이 반영될 것이라고 낙관한다.

미국측 고위 소식통이 전하는 회담분위기를 봐도 한.미간의 입장차이는 많이 좁혀진 것으로 보인다.

핵심적 문제에서 한국과 미국이 의견을 달리한 부분은 북한이 이쪽의 포용정책에 호응하지 않고 핵과 미사일 개발을 계속할 경우의 대응수단에 관한 것이다.

미국은 인내의 한계선 (Red line) 을 그어놓고 북한이 그 선을 넘으면 물리적 힘을 포함한 수단으로 북한을 압박할 준비를 갖추는 것이 현실적인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한국은 북한을 압박하는 강경조치는 지금까지 쌓아 온 대북정책의 성과를 하루 아침에 날리고 우리의 유일한 생존공간인 한반도는 다시 전쟁의 위험에 휘말리게 할 것이란 입장이다.

한.미간의 이런 입장 차이는 핵과 미사일 등의 현안을 대량 살상무기의 확산을 막고 핵확산금지조약 (NPT) 을 지키는 세계전략 안에서 해결해야 하는 초강대국의 입장과, 현안 해결이 포괄적인 접근을 통해 한반도의 냉전종식과 평화공존으로 연결되길 바라는 한국의 당연한 요구의 불가피한 충돌이다.

두 나라 사정이 이렇기 때문에 입장 조율에는 넘지못할 한계가 있다.

미국은 세계전략을 고려하면서 동시에 서슬 퍼런 의회의 감시를 벗어날 수 없다.

페리와의 회담결과가 만족스럽다는 정부 당국자의 말은 지금까지의 견해차를 크게 줄였다는 의미 정도로 들린다.

어떤 견해차가 좁혀지고 어떤 합의에 이른 것인가.

미국이 한국의 햇볕정책에 반대할 이유는 없다.

일괄타결 방식도 원칙으로는 좋다.

한국도 미국이 눈앞의 현안이고 의회가 관심을 갖는 핵과 미사일 문제 해결에 우선순위를 두는데 이의 (異議) 를 달 이유가 없다.

그래서 양측이 포괄적 접근으로 포용정책의 기조를 유지하자는데 합의하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고 본다.

그러나 구체적인 실천에 들어갔을 때 부닥칠 많은 견해차는 별개의 문제로 남아있다.

특히 어려운 것이 이른바 인내의 한계선이라는 문제다.

북한이 어느 선까지 가면 적색경보를 울릴 것인가.

그때 미국이 어떤 조치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한국은 한계선의 폭을 넓게 잡고, 미국의 행동이 북한을 물리적인 반발로 몰아가지 않는 범위로 한정할 것을 요구하고, 페리 일행의 원칙적인 동의를 받아낸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하면 미국의 대북 압박정책에 대한 한국의 인내 한계선을 설정한 것이다.

페리 보고서에서 한국의 대북정책이 가장 중요한 고려사항이다.

한반도 평화가 지상명령이라는 우리의 당연한 입장이 충분히 반영돼야 한다.

그러나 페리 보고서가 미국의 국내정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게 걱정이다.

페리 스스로도 햇볕정책에 대한 회의적 견해를 담은 '예방적 방어' 라는 책을 썼다.

페리라는 동일 인물이 책 따로, 보고서 따로 쓸 것인지 두고 볼 수밖에 없다.

서로의 국가이익이 다른 이상 한.미간의 거리를 완전히 메울 수는 없겠지만 페리가 쓰는 보고서가 포용정책의 기본틀을 흔들지 않길 바란다.

김영희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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