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슈퍼파워의 그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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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지난달 미국을 방문한 슈뢰더 독일총리는 간절히 바라던 선물을 얻지 못하고 돌아갔다.

그 선물이란 옛 동독 첩보기관 슈타지의 해외활동 파일이다.

통독 당시 미국중앙정보국 (CIA) 이 1백만달러 이상을 들여 입수했다는 이 파일에는 슈타지에 협조한 2만여명의 서독인에 관한 자료가 들어 있다고 한다.

독일로서는 과거청산을 위해 절실하게 필요한 자료다.

CIA는 이 파일이 공개될 경우 자기네 요원들이 위험에 처할 수 있다는 이유로 그 인도에 반대하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은 동독의 재산이던 이 파일이 이제 통일독일의 재산이니 당연히 반환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CIA가 이 파일을 무기로 독일 각계에 깃들여 있는 옛 슈타지 협조자들을 조종하려 든다는 의구심을 품는 사람들도 있다.

쿠르드 항전지도자 오잘란의 체포경위를 놓고도 미국에 대한 독일인의 감정은 좋지 않다.

50만 쿠르드인과 2백만 터키인이 살고 있는 독일이 오잘란 체포와 같은 사태에 큰 충격을 받으리라는 것은 예견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국은 상황의 진행을 독일측에 전연 알리지 않았다.

지난주엔 독일뿐 아니라 온 유럽인의 부아를 돋우는 판결 하나가 미 해병대 군사법정에서 나왔다.

지난해 2월 이탈리아의 알프스지역에서 훈련중이던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 소속 미군기가 케이블카의 줄을 끊어 독일인 7명을 포함해 타고 있던 20명의 관광객이 죽은 일이 있다.

3백m 이하의 저공비행이 금지돼 있는데 1백m 높이의 케이블을 끊은 데는 조종사의 중대한 과실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그런데 조종사가 소속한 미 해병대의 군사법정은 그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것이다.

OJ 심슨의 무죄판결에서 보듯 피의자를 최대한 옹호하는 미국 사법관행으로는 조종사의 무죄판결도 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유럽인의 눈에는 이런 참변에 책임지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미국정부가 보상책임을 떠맡겠다고 나서지만 돈만으로 해결될 일이냐며 유럽인들은 불만이고 각지에서 미군기지 철수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미.소대결시대에는 미국에 못마땅한 점이 있어도 소련과 비교가 되기도 하고 대결상황으로 변명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나라가 유일한 슈퍼파워 미국에 피해의식을 갖게 됐다.

파시즘으로부터 유럽을 지켜주고 공산주의로부터 세계를 지켜줬다고 자부하는 미국으로선 억울한 일이다.

그러나 세계화가 곧 미국화인 상황을 만들어 놓은 이상 전세계의 모델로서 모든 비판을 모으는 것은 미국의 자업자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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