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유해 수난시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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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영화 '아편전쟁' 에는 19세기 중엽 홍콩에 진출해 있던 유럽 상인들의 모험적이고 탐욕적인 모습이 여실히 그려져 있다.

산업발전이 융성하던 당시의 유럽을 마다하고 지구 반대편에 와 새로운 사업의 기회를 찾던 이들은 상인이라기보다 정복자였다.

이익의 기회가 커질 것을 바라 전쟁을 부추기기까지 하던 이들 중에는 기초적 상도덕도 없는 자가 많았다.

아편전쟁 (1840~42) 의 결과 새로 개항장이 된 상하이 (上海) 는 그래도 오래 자리잡힌 홍콩보다 더 험악한 분위기로 발전했다.

오죽하면 'shanghai' 란 말이 '납치한다' 는 뜻의 동사로 영어에 자리잡을 정도였다.

독일인 오페르트는 1860년대 상하이를 주름잡던 전형적인 모험상인이었다.

제2차 중영전쟁 (1856~60) 의 승리로 기세가 하늘까지 뻗쳐 있던 상하이의 유럽상인들에게 1866년 조선의 천주교 박해 소식은 하나의 새로운 '껀수' 였다.

그러나 출동한 프랑스함대가 큰 성과 없이 돌아오자 (병인양요) 상인들은 불만을 가졌다.

오페르트의 돌출행동은 이 불만을 반영한 것이었다.

오페르트는 충청도의 해안 가까이 있던 남연군의 묘를 기습해 유해를 탈취, 조선 조정을 협박해 통상을 열려는 계획을 세웠다.

남연군은 고종의 할아버지다.

할아버지의 시신을 협상의 무기로 삼으라는 꾀는 박해를 피해온 천주교인들이 가르쳐준 것이었다.

1868년 5월 오페르트는 1백40명의 일당을 이끌고 아산만에 상륙했다.

그러나 묘소까지는 일부만이 갈 수 있었고 그 인원으로는 견고한 묘광을 하룻밤 안에 깨뜨릴 수 없었다.

유해 납치에 실패한 채 오페르트는 돌아갔지만 묘소 훼손에 분노한 조정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했다.

이 '만행' 에 협조한 것으로 알려진 천주교는 더 심한 탄압을 받았다.

시신의 침해는 유교사회에서 극악무도한 죄였다.

천주교인들이 이런 죄를 무릅쓰며 서양세력의 진출에 희망을 걸었던 이유는 조정의 탄압이 워낙 혹심한 데 있었다.

천주교인들 중에는 조선의 기존질서와 문화에 최대한 순응하려는 노력도 있었지만 1801년 이래 일방적 탄압을 받는 가운데 현세부정적인 원리주의가 지배적 성향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시신을 신성시하는 마음은 우리 사회에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이 애달픈 마음까지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신앙의 자유와 목숨을 빼앗기며 구체제를 냉소하던 천주교인들과 같은 절박한 마음이 이 사회에 깔린 것일까. 유해가 자칫 범죄의 표적이 되느니 차라리 죽어 한줌 재로 돌아가는 화장 (火葬) 이야말로 사후 (死後) 평안의 확실한 길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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