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문답] 10.끝 삼각산 화계사 조실 숭산선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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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대담 = 이은윤 종교 전문위원]

이제 도심속 사찰로 변한 서울 삼각산 화계사지만 그래도 산새들이 겨울철 나목 (裸木) 사이를 분주히 오간다. 산밑 조실방은 유거 (幽居) 의 선적 (禪寂) 을 느끼기에 전혀 모자람이 없다.

숭산 (崇山) 화상 (72) 의 법맥상 증조부 벌인 경허선사 (1846 - 1912) 는 우연히 읊은 시 (偶吟詩)에서 자신의 '선적' 을 다음과 같이 노래한 바 있다.

깊은 산속 새들도 나의 고독을 아는지 (幽禽知我獨) , 지나가며 그림자를 창가에 남기는구나 (影影過窓前) . 화계사 조실방은 도시생활의 '군중속 고독' 이 직관적 각성을 일으켜 밝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진아 (Real self) 를 또렷히 보게하는 선적으로 꽉 차있다. 이래서 경허의 우음시는 오늘의 도회지 사찰에서도 살아 숨쉬는 가보다.

한국의 몇 안되는 국제선원이기도 한 화계사 선방에는 이번 동안거 (음력98년 10월15일 - 99년 1월15일)에 방부 (房付) 한 20여명의 세계 각국 납자 (衲子) 들이 정진중이었다. 이미 한국 선불교 국제 포교의 제일인자이며 세계적인 선사 (Master) 로 존경받는 숭산화상의 바쁜 살림살이를 잠시 비집고 들어가 만나 봤다.

문 : 어떤 사람이 병속에다 거위 새끼를 길렀습니다. 거위는 하루가 다르게 자라 병속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게 됐지요. 이 때 병도 깨지 않고 거위도 다치지 않게 하면서 병속의 거위를 꺼낼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요.

답 : (숭산화상이 갑자기 큰 소리로 "이기자" 하고 부르기에 "예" 하고 대답을 하니) 나오너라!

<질문은 스핑크스의 수수께끼같은 난제로 상대방을 옥죄어 보려는 공격이다. 그러나 숭산선사는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일상속의 '응답' 을 통해 마치 요술처럼 금시 난제를 해결했다. 그렇다면 그의 말후구 (末后句) "나오너라!" 가 뜻하는 바는 과연 무엇일까. 선학적인 결론부터 우선 말한다면 부르고 응답안에 함축된 자성 (自性) 의 체용일여 (體用一如).유무초월을 통한 모순의 극복이다.< p>

다시 말해 기자의 좁은 지견 (知見) 을 상징하는 협소한 병이라는 공간 안에 갇혀있는 거위 (자성본체) 는 숭산선사가 기자를 불렀을때 "예" 라고 대답한 자성의 작용을 통해 대답이 입밖으로 튀어나오듯이 넓은 바다 (견성의 세계) 로 나온 것이다.곡예 치고는 대단한 곡예다.

"나오너라!" 는 한 마디로 병속의 작은 세계에 갇혀있는 기자의 지견을 해방시켜 주었다. 병속에 갇혀있는 건 원래 거위가 아니라 기자의 좁디 좁은 소견이다. 구체적으론 큰 것 (거위) 과 작은 것 (병) 을 구분한 분별심이다.

크고 작다는 분별의 마음만 내지 않으면 작은 병속의 큰 거위가 병을 깨지도, 다치지도 않고 나오는 건 문제가 되질 않는다. '병중아 (甁中鵝)' 라는 이 화두는 남전보원선사 (748 - 834) 와 그의 속가 제자 육긍대부 (陸亘大夫)가 거량했던 선림의 유명한 공안이다.>

문 : 깨달은 사람도 인과법칙 (因果法則) 의 지배를 받습니까.

답 : 여우가 죽었다.

<깨달은 자에게도 인과응보가 따르느냐는데 웬 죽은 여우 이야기일까. 선사들은 으례 이처럼 전혀 엉뚱하거나 애매모호한 대답으로 질문자가 마음껏 상상의 나래를 펴도록 한다. 이는 질문자의 창의력을 무한히 북돋우어 기존의 도로가 아닌 다른 길을 통해 서울에 도착케 하려는 것이다.< p>

늘 다니는 고속도로나 철로보다는 전혀 낯선 길을 통해 서울을 올때 모르던 것들을 많이 봄으로써 체험의 폭을 넓히는 이른바 체득 (體得) 을 하게 된다.

인생살이에서 체득의 경험만큼 산 지식은 없다. 선수행이란 한마디로 창의력과 직관력을 고양하는 일이다.

그래서 선의 화두에는 원래 정답이 없고 각자가 창의적인 자각을 통해 해답을 창출해내야 한다. 선에서의 창의력은 생명의 본질일뿐만 아니라 내면성찰을 통한 '자아발견' 에 이르는 지름길이다.

원래 '창조하다' 라는 영어 create의 어원인 라틴어의 creatus도 '발견하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른바 '깨침' 이라는 자아 발견은 창조적인 각성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게 선의 확고한 경험칙 (經驗則) 이다. 선이 이미 1천5백년전 이같이 21세기 정보화시대의 핵심요소로 강조되는 창의력을 깨달음의 중요내용으로 제시했다는 점에 우리는 새삼 놀라지 않을수 없다.

숭산화상의 "여우가 죽었다" 는 대답은 깨친 자도 인과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뜻이다. 다만 깨친 자는 인과법칙에 우매하지 않고 훤히 꿰뚫어 보는 불매인과 (不昧因果) 의 심안 (心眼) 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여우의 죽음을 통해 인과법칙과 깨침의 관계를 설파한 유명 공안으로는 백장회해선사 (749 - 814) 의 '백장야호 (百丈野狐)' 라는 화두가 있다.>

문 : 부처의 청정법신 (淸淨法身) 이란 어떤 겁니까.

답 :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부처의 몸은 신앙적으론 법신.보신 (報身).화신 (化身) 이라는 3위일체로 구성돼 있다. 본체에 해당하는 부분이 청정법신이고 작용 (실천) 을 담당하는 게 천만억 화신이다.< p>

'산은 푸르다' 는 것은 범부의 육안이 본 소박한 실재론 (naive realism)에서 일단 내던지는 부정 후에 다시 거두어들인 선의 변증법적 긍정에서 심안이 본 부활의 실재론 (revival realism) 이다. 불생불멸의 법신은 그 자체로 만족한채 머물러 있어선 아무런 쓸모가 없다.

이러한 깨달음은 선문에서 거듭 경계해 온 낙공 (落空) 의 허무주의고, 사선 (死禪) 이고, 사구 (死句) 다. '산은 산이고, 물은 물' 인데서 한걸음 나아가 '물은 흘러가' 는 깨침의 실천이 뒤따를 때 비로소 8만4천 법문은 행동하는 말씀 (Logos of praxis) 으로서 중생제도라는 구원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숭산선사는 선의 이같은 체용일여론 (體用一如論)에서 특히 '용 (실천)' 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법어집 제목도 "산은 푸르고 물은 흘러간다" 라고 했다. 법신이라는 본체가 깨침을 통해 원만보신이 되고 다시 행동하는 화신이 되어야 3위일체 부처가 완성된다는 얘기다.

숭산은 이러한 자신의 가풍을 늘 ' - 할 뿐이다' 는 말로 요약, 배고픈 자를 만나면 밥을 주고 억눌린 자를 보면 해방시키는 이웃 사랑과 헌신적인 봉사를 강조한다.>

문 : 부처란 무엇입니까.

답 : 김치다.

<부처가 김치라니 언뜻 듣기엔 신성 (神聖) 모독 같다. 과연 전혀 무의미한 동문서답일까. 이러한 무의미 속에서 의미를 찾아내는게 바로 선이다. 한마디로 부처란 자신이 스스로 체득하는 실존적 경험이며 타인.사회.우주와 자기의 관계 정립이라는 얘기다. 컵속의 물이 찬물인지 더운 물인지는 마셔 보고 아는 냉온자지 (冷溫自知) 의 방법이 가장 정확하다.< p>

김치 맛도 마찬가지다. 한국의 김치맛을 '시콤 달콤' 이니, '맵고 짜' 니 하는 온갖 형용사로 설명을 해도 직접 먹어 보고 맛을 아는 것을 따를 수가 없다. 마치 결혼 첫날 밤을 아무리 뛰어난 문재 (文才) 로 형용하고 표현해도 그 '맛' 을 체험한 사람의 실감을 충족시켜줄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부처' 는 먹어봐야 진짜 김치 맛을 실감하듯이 직관적 통찰을 통한 체득이 아닌 언어 문자의 설명으론 그 진실을 드러낼 수 없다. 이것이 바로 불립문자 (不立文字) , 언어도단의 불법세계라는 것이다.>

문 : 어떤 것이 몽상검 (夢想劍) 입니까.

답 : 해골이다.

<몽상검이란 선에서 흔히 말하는 머리카락이 그 날에 닿기만 해도 잘라지는 취모검 (吹毛劍) 과 같은 것으로 반야지혜를 상징한다. 이 칼은 꿈 속에서 휘둘러도 목표물을 적중시킨다. 즉 무의식으로 칼을 휘둘러 쓰러뜨려야 할 상대를 정확히 베어버리는 달인의 검술 (劍術) 을 뜻한다.< p>

따라서 몽상검은 어떤 마음을 일으킬 때 무슨 목적이나 의식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 무의식 가운데서 생각을 창출해내는 것이 바로 몽상검으로 상징되는 선의 요체다. 금강경의 핵심인 '응무소주이 생기심 (應無所住而 生其心 : 마음을 비우고 생각을 일으키라)' 도 이같은 뜻이다.

해골은 상대의 목 (번뇌) 을 베어 피가 뚝뚝 떨어지는 채 나뒹구는 살활 (殺活) 자재한 살인검.활인검 (活人劍) 으로서의 몽상검을 실감나게 구체화 시킨 것이다. >

문 : (대담을 마치니 정오가 됐다. 숭신스님은 시자에게 점심 공양을 대접하란다.) 삼세심불가득 (三世心不可得) 이라 했는데 스님께서는 과거.현재.미래심 가운데 어느 마음으로 점심을 드시려 하십니까.

답 : 배가 고플 뿐이다.

<점심 (点心) 이란 군자의 정오 끼니는 마음에 점을 하나 찍는 것으로 대신한다는 유가의 검약정신에서 유래한 말이다. 황벽희운선사 (? - 850) 는 "과거.현재.미래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음은 곧 삼세를 함께 버리는 것" 으로 무사 (無事) 의 입문이라고 설파한 바 있다. 우리는 배가 고플 때 밥을 먹는다.< p>

인간의 원초적 생명은 이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물적 무의식에 뿌리를 둔 본능에 의해 지탱된다. 선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는 과학적 설명이 불가능한 이같은 무의식의 세계를 그 종착점으로 하고있다.

시간과 공간속의 모든 세상사가 하나도 똑같은게 없지만 배가 고파서 점심을 먹는 일만은 어제나 오늘이나 다름 없는 평상 (平常) 이다. 배가 고파 점심을 먹는 일은 그래서 불성 (佛性) 의 본질인 '상주불변' 과 동일한 맥락이며 순리다. 이쯤이면 배가 고파 밥을 먹는 자연적 섭리야말로 하찮은 다반사 (茶飯事)가 아님을 알수있다.

일명 '덕산성오 (德山省悟)' 라고도 하는 화두 '삼세심불가득' 은 제자들을 몽둥이로 두드려 패는 방 (棒) 으로 유명했던 덕산선감선사의 선적 깨달음을 인도한 공안이기도 하다.

교종 승려였던 덕산은 길가의 떡장수 노파한테 점심으로 떡을 사먹으려다 위와 같은 질문을 받고 말이 막혀 선수행을 시작, 대선장 (大禪匠) 이 됐다. >

[숭산 선사는]

▶1927년 평남 순천 출생▶1945~49년 평양 평안공고.동국대 불교학과 졸업▶1947년 마곡사 출가▶1949년 수덕사서 고봉선사로부터 비구계 수지▶1958년 화계사 주지▶1962년 조계종비상종회 의장▶1966년 일본 홍법원 개설이래 현재 32개국 1백30개 선원개설, 서양인 사법제자 5명 인가 20명 초견성 인가▶1999년 화계사 조실

그동안 애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격려와 질책을 받아 온 「선문답」시리즈는 이번 회로 끝을 맺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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