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만들며 알았어요, 진짜 우정이 무엇인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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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생들이 외국 유명 서적을 번역해 최근 출판했다. ‘10년 지기 동네 친구’ 사이인 이들은 전문가가 아닌 평범한 학생들. 이들은 왜, 어떻게 책을 번역하게 됐을까.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로 잘 알려진 잭 캔필드의 『청소년의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 (한글판 『사춘기, 마음을 말하다』)를 번역한 여덟 명의 학생을 만났다.

“친구들과의 공동작업 경험이 살아가는 데 큰 힘이 될 거예요.” 박건민·이혜연·박지영·전병주·황정우·서연수·전석희·홍승우 학생(왼쪽부터).

‘뭐 별거 있겠어’ 겁 없이 도전

이들은 지금 대한민국에서 가장 바쁘다는 고등학생이다. 10분이라도 더 자고 싶은 때에 없는 시간을 쪼개 번역 작업에 뛰어든 이유가 뭘까. ‘10대의 마지막 청소년기에 뭔가 뜻 깊은 일을 해보고 싶다’는 작은 바람에서 시작했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책을 고른 것도 또래 친구들의 이야기라는 점 때문이었다. 엄마들도 흔쾌히 아이들의 도전에 박수를 쳐줬다. 한 엄마는 직접 출판사를 알아봐 주기까지 했다.

새 학년이 시작돼 분주한 지난봄, 번역 작업에 들어갔다. 책의 여덟 단원을 제비 뽑기로 사이 좋게 나눴다. 주중에 각자 작업을 한 후 주말에 만나 확인했다.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물어가며 해결했다.

학생 신분이라 피해갈 수 없는 중간·기말고사, 모의고사 때는 더 어려움이 많았다. 서연수(이대부고 2)양은 “하필 분량이 제일 많은 단원을 맡게 돼 더 힘이 들었다”고 푸념했다. 박지영(명지고 2)군은 “시험기간에는 매일 새벽 2~3시까지 공부와 번역을 병행해야 했다”고 말했다. 시험 공부는 미뤄둔 채 원서를 보고 있던 홍승우(세화고 2)군에게 반 친구들은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느냐”고 핀잔을 줬다. 그래도 친구들을 깜짝 놀라게 해줄 생각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단다.

번역 작업 통해 우정과 영어 실력 함께 얻어

이번 작업이 쉽지만은 않았다. 영어 좀 한다고 자부하는 여덟 명이었지만 출판을 위한 번역은 쉽지 않았다. 박건민(충암고 2)군은 처음에 ‘뭐 별거 있겠어?’ 하는 생각으로 시작했다가 후회한 적도 많았다고 고백했다. 외국 청소년들의 문화를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이해할 수 있게 번역해야 한다는 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는 것. 처음 접하는 단어, 우리와 다른 문화, 생소한 표현, 무슨 뜻인지는 알지만 우리말로 표현하기 힘든 문장들. 하지만 어려움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영어 실력도 쑥쑥 자랐다.

전병주(명덕외고 2)양은 관용구나 구어체 표현을 찾느라 인터넷을 뒤졌다. 그래도 모르면 영어학원에 가져가 원어민 강사에게 부탁해 해결했다. 안 풀리는 부분이 있으면 며칠이고 매달렸다. 각자 맡은 분량이 있어 약속을 지키지 못하면 모두에게 피해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급함과 부담감이 오히려 영어 실력 향상에는 도움이 됐다. 서양은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번역 작업을 시도해볼 것”을 권했다. 박지영군은 “친한 친구들과 공동작업을 하면 더 친해지고, 안 친했던 친구들도 가까워지는 데 도움이 된다”며 “영어 실력까지 늘어나니 일석이조”라고 말했다

이들 여덟 명의 친구가 공부만큼이나 신경 쓰는 부분이 자원봉사다. 박지영군과 박건민군은 이번 여름방학에 몽골로 해비탯 봉사활동을 다녀왔다. 지영군은 “학교 성적도 중요하지만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기회가 닿는 대로 여러 활동에 참여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혜연(이대부고 2)양은 국제교류 봉사동아리 인터액트에서 위원장을 맡아 일본 양로원과 한국 유치원·공부방에서 자원봉사를 했다. 전석희(이대부고 3)양과 병주양은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에서 통·번역 자원봉사를 한 경험이 있다. 의대 진학이 꿈인 병주양은 무의촌 진료 봉사에도 참여한 적이 있다.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때, 함께한 도전과 경험이 큰 힘

병주양은 “번역이라는 작업도 중요했지만 우정·친구에 대한 내용이 담긴 책을 번역하면서 진정한 우정이 무엇인지, 자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생각하는 소중한 시간이었다”고 말했다. 이혜연양은 청소년 시절 친구는 누드 김밥이나 누드 체중계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관계가 아니길 바랐다. 이양은 “마음이 보이면 사소한 오해나 의심을 안 해 좋겠지만 적당한 비밀이 있어야 서로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며 “친구끼리만 공유하는 비밀이 하나쯤 있어야 사이가 더 각별해진다”고 설명했다.

홍군은 엄마와 싸우고 집을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 친구들의 격려와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충고 때문에 가출하지 않았다. 전석희양은 번역을 하면서 또래 친구들의 우정에 ‘맞다. 나도 이런 적 있었는데’라며 공감한 적이 많았다고 말했다. 친구 관계는 전 세계 청소년들에게 가장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황정우(숭실고 1)군은 가장 친한 친구의 죽음이란 부분을 번역하면서 “과거에 친구들에게 무심코 험한 말을 내뱉은 적은 없는지 뒤돌아보게 됐다”고 말했다. 가까운 친구일수록 더 조심하고 신경 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는 것.

“우리는 그동안 많은 것을 함께 해왔어요. 같이 공부하고 여행도 다니고. 함께 배우고 생각하고 느꼈죠. 그 가운데 이번 작업이 가장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요.”(전병주양)

이번 작업을 하는 동안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적이 많았다는 이들. 서로 보낸 응원의 메시지는 큰 에너지가 됐다. 박건민군은 “10대를 지나면 더 힘들고 포기하고 싶을 순간이 많겠죠. 하지만 10대에 만난 친구들과 함께한 도전, 경험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지 않겠느냐”며 환하게 웃었다.

박정현 기자

번역 이렇게 도전해 보세요

- 작업을 함께할 친구들을 모은다.

- 책을 함께 선정한다.

- 청소년들에 관한 책이면 더 관심 있게 참여할 수 있다.

- 처음에는 페이지가 적은 원서부터 시작한다.

- 한국판이 있다면 결과물을 비교해볼 수 있다.

- 각자 담당할 분량을 정한다.

- 일주일에 한 번 따로 만나 점검한다.

-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으므로 할 수 있을 만큼만 한다.

- 모르는 부분은 가까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 그 나라만의 문화를 모르면 원어민에게 부탁한다.

- 교정·편집·표지도 역할을 정한다.

- 완성된 번역본을 반드시 출판하겠다는 욕심을 버린다.

- 결과물을 보며 서로를 칭찬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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