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국정 역할 위임' 새 실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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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일 오후 2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군 장성의 영접을 받으며 서울 용산 국방부 청사에 들어섰다. 곧바로 국방부 장관 집무실로 올라간 정 장관은 배석자를 물리치고 윤광웅 장관과 30분간 만났다. 이어 김종환 합참의장 방도 들렀다. "타 부처 장관, 그것도 통일부 장관의 국방부 방문은 이례적"이라고 국방부 관계자들은 설명했다. 특별한 현안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정 장관은 왜 국방부 청사에까지 가서 국방부 장관을 만났을까.

여권 고위 관계자는 12일 이렇게 설명했다.

"정 장관은 사실상 통일외교안보 부처의 팀장 자격으로 협조를 요청하기 위해 국방부를 찾은 것이며 이는 노무현 대통령의 지시에 따른 것"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일상적 국정운영은 총리가 총괄해 나가고 대통령은 장기적 국가 전략과제를 추진하는 데 집중해 나가겠다"는 노 대통령의 10일 국무회의 발언을 끄집어냈다. 그는 "대통령과 총리가 역할 분담을 했듯이 내각의 주요 분야에서도 구체적인 업무 분장이 이뤄진 것으로 안다"며 "정 장관에겐 통일외교안보 부처의 수장을 맡아 정책을 조율케 한다는 게 대통령의 뜻"이라고 덧붙였다. 구체적으로 이해찬 총리는 내각 업무를 총괄하되 특히 신행정수도 건설을 비롯한 경제문제 등에 집중케 하고, 정동영 장관은 남북문제와 함께 자주적인 방향으로의 외교통상부 개혁, 국방부 문민화 문제 등을 총괄 조율케 한다는 것이다. 그는 "같은 맥락에서 김근태 보건복지부 장관은 문재인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을 파트너로 사회복지 정책을 책임지고 이끌어 나가도록 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방침은 사실상 국정운영을 '팀제화'하면서 '위임형 분할 통치'로 집권 2기를 끌어나가겠다는 새로운 정치실험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국정 주요 영역에 열린우리당 출신의 '이해찬-정동영-김근태'로 이어지는 3각 포스트를 세움으로써 책임과 효율을 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동영 장관은 국방부 방문에 앞서서는 고영구 국가정보원장과도 회동했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에 대한 정부의 대응에서도 팀장을 맡았다. 지난달 말 400여명의 탈북자가 입국했을 땐 반기문 외교부 장관과 입국 시기 등을 조율했다. 정부과천청사에 집무실이 있는 김근태 장관도 재정경제부.과학기술부.비상기획위원회 등을 방문, 장관들과 의견을 교환하며 보폭을 넓히고 있다. 최근 발생한 식의약청 유해약품 파문 등 현안 해결에도 강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이 총리는 행정수도 예정지를 직접 발표하며 이 문제에 총대를 메고 있다.

내각 업무 관장에 관한 노 대통령의 그림 속에는 차기 주자 그룹의 역할 분담을 통해 난국을 타개하고, 이들을 전면에 부상시켜 이들 간의 경쟁을 국정운영의 동력으로 이끌어 내겠다는 포석이 담긴 것으로 여권 관계자들은 분석하고 있다. 이 경우 그동안 노 대통령 주변을 둘러싼 실세 그룹의 역학관계도 급변할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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