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파동]11시간 격론…평검사들 토해낸 말.말.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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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2일 오후 3시부터 다음날인 3일 오전 2시까지 장장 11시간에 걸쳐 진행된 전국 차장.수석검사 회의에서 59명의 검사들은 가슴속에 품고 있던 뜨거운 목소리들을 잇따라 토해냈다.

검찰 사상 초유의 서명파동 이후 검찰 수뇌부가 황급히 마련한 난상 토론장에서 이들의 말투는 예상보다 부드러웠다.

그러나 발언 내용에는 총장 용퇴론까지를 포함, 성역이 없었다는 후문이다.

회의는 대부분의 검사들이 의견을 개진한 뒤 이원성 (李源性) 대검 차장이 이에 대해 총괄 답변하는 식으로 진행됐다.

자정을 넘어서부터는 李차장을 상대로 일문일답식 속사포 질문도 이어졌다.

이들은 오전 1시쯤 "모든 간부들은 자리를 비켜달라" 며 한시간여 자체 토론시간을 가졌다.

그 뒤 '검찰총장을 중심으로 일치단결한다' 는 합의문을 도출해냈다.

◇ 대전사건 처리불만 = 검사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부분을 지적했다.

사표내고 떠나는 선배들을 보고 울었다는 검사는 "초임검사 시절 선배로부터 사건관계로 돈을 받아서는 안되지만 명절 떡값이나 전별금은 받아 직원회식 등에 써도 좋다고 배웠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수년전의 일을 끄집어내 '범죄' 로 만들고 희생양을 만드는 게 옳으냐" 고 따졌다.

한 검사는 "떡값으로 검사가 사표 내고 징계 받는 것을 보니 자괴감이 든다.

누구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한데 수뇌부가 여론의 눈치만을 보고 부하

검사에게 사표를 강요한 것은 가혹했다" 고 지적했다.

"수임비리만 수사하고 앞으로 이런 관행을 없애겠다고 수뇌부가 선언했어야 한다" 는 주장도 나왔다.

"국민들이 검사에게 기대하는 청렴의 수준을 알게 됐으며 앞으로 어떤 형태의 금품도 받지 않겠다" 는 다짐과 "월급만 갖고 살테니 수사비.야근비 등을 현실화해 달라" 는 요구도 있었다.

◇ 총장 사퇴론과 임기 고수론 = 이 문제는 처음부터 초미의 관심사였다.

일부 검사들은 '결단' 이란 우회적 표현으로 총장의 사퇴문제를 거론했다.

한 검사는 "검찰 수뇌부가 조직을 제대로 보호해주지 않았다. 새로 태어나려면 수뇌부의 용기있는 결단이 필요하다" 고 말했다.

또 다른 검사는 "대전사건에서 수뇌부가 (사표낸) 검사들의 눈물을 닦아줬어야 했다" 고 말했다.

밤이 깊어가면서 "검찰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 이번 사건이 수습되고 조직이 안정된 뒤 총장이 용퇴해야 한다" 는 좀 더 직설적인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총장 사퇴불가의 목소리가 많았다.

"어떻게 얻은 총장 임기제인데 우리가 스스로 이를 훼손하느냐. 이번에 (총장이) 물러나면 앞으로 시민단체 등에서 (사퇴를) 요구할 때마다 빌미를 주게 된다" 는 논리였다.

또 "이번 분위기에서 총장이 물러나면 검찰 외부에서 영입될 가능성이 크다" 는 이색주장도 나왔다.

서명에 참여하지 않은 한 지청 검사는 "서명한 검찰청 검사들에게 묻겠다.

지금 총장이 물러나면 어떤 이점이 있느냐" 고 사퇴론을 정면 반박하기도

했다.

"정치적 중립성을 유지하려면 총장이 사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총장 임기제를 우리가 지켜야 한다" 는 주장이었다.

◇ 정치적 중립 논란 = 국회 529실 사건과 정치인 사정수사가 도마에 올랐다.

한 검사는 "529실 사건에서 여당을 보호하기 위한 수사태도가 엿보였다" 며

"법원에서 영장까지 기각되는 등 이게 무슨 창피냐" 고 상기시켰다.

심재륜 (沈在淪) 대구고검장의 발언에 대해서도 "항명이라는 형식은 분명히 문제지만 내용은 공감할 부분이 있었다.

굳이 그분에게 무리할 필요가 있었느냐" 는 의견이 있었다.

"정치적 중립은 결국 수뇌부의 의지문제다. 이 문제 만큼은 (수뇌부가) 책임져야 한다" 는 원론적 이야기도 덧붙여졌다.

◇ 인사불만 = 검찰의 최근 인사관행에 신랄한 비판이 쏟아졌다.

"검찰총장부터 말단 검사까지 인사철이 되면 정치인에게 줄대기하는 현실에서 어떻게 정치적 독립이 가능한가" 라는 자탄도 나왔다.

어떤 검사는 "특정 지역에 대한 인사편중이 심하다. 아무리 과거에 소외됐다 하더라도 너무 표나게 한다" 며 "실력과 연공서열이 중시되는 공정한 인사를 해달라" 고 주문했다.

한 검사는 "검사 인사권이 장관에서 총장에게로 옮겨져야 한다.

장관은 어차피 정치인이고 대통령의 참모이기 때문에 정치권으로부터의 독립이 불가능하다" 는 제안도 나왔다.

◇ 연판장 문제 = 서명을 주도한 서울지검 검사는 "처음에는 총장에게 직접 의견서를 전달하려 했지만 검사장에게 먼저 복사본을 드리는 것이 절차상 옳겠다고 생각, 그렇게 하려 했는데 회의가 열린다는 말을 듣고 폐기했다" 고 설명했다.

다른 검사는 "조직이 흔들리는 것을 바라고 이런 행동을 했겠느냐. 검찰이 잘 되기를 바라면서 결심한 것" 이라고 말했다.

◇ 기타 = 언론의 보도태도에 대한 불만도 수차례 제기됐다.

한 참석자는 "언론을 왜 상전으로만 보나. 잘못되고 과장된 보도는 시정해야 한다.

검사 개개인이 헌법상 독립기관인 만큼 앞으로 언론사에 대해 정정보도.손해배상 등 법적 대응하는 것을 수뇌부는 막지 말라" 고 말했다.

어떤 이는 "아이들이 아버지 얼굴을 못 본다고 아우성인데 수뇌부는 일선 검사의 이런 고충을 제대로 알고 있느냐" 고 호소했다.

또 "오늘 회의로 언로 (言路)가 트였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 자리를 자주 마련해 달라" 는 주문도 있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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