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그놈의 정치때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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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브라질의 페르난두 엔리케 카르도주 대통령과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모하마드 총리, 그리고 우리의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을 하나로 묶는다면 적잖은 사람들이 의아해할 것이다.

셋은 외환 및 금융위기에서 나라 경제를 구해내는 대과업을 맡았다.

셋은 모두 준비된 프로다.

카르도주는 경제학교수 출신으로 최장수 재무장관을 역임한 경제전문가다.

브라질 경제의 '해결사' 로 통한다.

마하티르는 의사 출신의 국가경영자다.

환자를 대하듯 말레이시아의 국가적 '질환' 에 꼼꼼히 처방을 내린다.

'준비된 대통령' DJ는 따로 설명이 필요없다.

지금까지의 개혁실적이 괄목할 만하다는 점에서도 셋은 똑같다.

그리고 국내의 정적 (政敵) 을 포용하지 못하는 정치력부재로 정치적 혼란을 빚고, 그로 인해 경제개혁이 발목잡히고 개혁의 성과가 무위로 돌아가는 위기상황을 불러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비슷하다.

카르도주가 재무장관이었던 94년 브라질의 인플레는 2천%였다.

휴지쪽만도 못한 화폐 크루제이로를 퇴장시키고 레알 (Real) 을 도입했다.

환율은 1달러에 1레알로 고정시켰다.

인플레는 96년에 66%, 97년에 15%로 가라앉았다.

체질화된 인플레에 종지부를 찍고 실업률도 5% 미만으로 낮췄다.

물론 그 대가도 엄청났다.

통화긴축과 30%를 웃도는 고금리정책이 고수됐고, 이 때문에 성장은 둔화되고 경상수지는 악화됐다.

재정긴축과 공공부문 개혁이 뒷받침되면 브라질 경제는 안정궤도로 진입할 참이었다.

카르도주는 재정의 경직성 타파를 위해 세수의 일정비율을 지방재정에 할당하는 헌법조항의 개정을 추진했지만 지방정부의 영향력이 막강한 의회의 반대로 번번이 무산됐다.

전직대통령이었던 이타마르 프랑쿠가 미나스제라이스 주지사에 취임하자마자 정적인 카르도주를 궁지에 몰기 위해 모라토리엄 (지불유예) 을 선언했고, 카르도주는 재정분담금 동결로 감정적으로 맞섰다.

정치력 부재가 브라질 경제는 물론이고 세계 경제를 위협하는 사태로 번진 것이다.

공공부문 개혁이 기득권 정치세력에 발목을 잡혀 '10년 공든 탑' 이 졸지에 무너져내렸다.

국제통화기금 (IMF) 처방을 반대하며 외환통제로 '마이웨이' 를 선언한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는 최근 기고만장이다.

그러나 이는 허장성세며 국내정치 불안과 외국 투자자들의 냉담한 반응으로 국가 경제는 속으로 곪고 있다.

외환통제 이후 주가가 회복되고 외환보유액이 증가하며 경제지표들이 호전되고 있다고는 하지만 수입 급감에 따른 단기적인 성과일 뿐 무리한 통제정책은 장기적으로 경제 전반의 부실로 확산되고 있다.

외환통제에 아이디어를 제공했던 미국의 경제학자 폴 크루그먼은 마하티르에 공개서한을 보내고 외환통제는 "일시적으로 숨을 돌리는 단기처방에 불과하며 장기적으로 경제를 심하게 왜곡시킨다.

어디까지나 개혁의 보조수단이며 개혁의 대안이 돼서는 안된다" 고 주의를 요망했을 정도다.

정적 탄압에 대한 국내외 반대여론과 정치력 부재 (不在) , 그리고 민주화 개혁을 외면하는 마하티르의 '무리수' 가 말레이시아 경제의 공든 탑을 근저에서부터 흔들고 있다.

DJ는 '정치9단' 으로 통하지만 집권후 우리의 정치는 달라진 것이 없다.

사사건건 발목을 잡는 야당도 문제지만 이를 포용하는 정치력도 보이지 않는다.

경제가 회복된다지만 한국은 아직도 투자부적격 나라고, 외환보유액의 60% 이상은 꼬박 이자를 물고 빌려온 돈이다.

규제를 풀고, 공공부문개혁을 솔선하고, 기업구조조정이 제대로 되도록 입법 및 제도적 장치를 서둘러 갖춰줘야 함에도 정치판은 태평이다.

야당은 툭하면 거리로 나서고, 같은 여권은 빚독촉하듯 내각제로 '몽니' 를 부린다.

솔직히 말해 DJ에 표를 찍은 40% 유권자 가운데 내각제를 기대하고 표를 던진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런 정치판에서 내각제가 되면 그야말로 갈라먹기판이 십상인데 과연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내각제 개헌을 지지할까. 내각제를 성사시키려면 정치부터 제 자리를 잡아야 한다.

전직대통령을 청문회에 불러내 '웃고 즐길' 때인가.

오죽하면 국제신용평가기관이 신용등급 재조정을 앞두고 정치권 인사들의 면담을 요구할까. 우리 정치인들은 배알도 없는가.

경제가 잘못되면 국제기관 등 외국의 도움을 청할 수도 있다.

'그놈의 정치' 때문에 경제가 망가지는 것은 바깥의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도 없다.

도대체 우리 정치인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변상근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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