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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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철규를 조수석으로 밀치고 태호가 핸들을 잡았다. 그들이 찾아간 곳은 온천장이 있는 부곡이었다. 나돌던 평판대로 관광특구인 온천거리는 다닥다닥 붙어서 명멸하는 간판들의 불빛으로 요란벅적했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불빛들은 어딘지 모르게 허황되고 과장되었다는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요란한 불빛과는 대조적으로 거리는 한산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허우대가 멀쑥한 호객꾼들만 길위에서 궁싯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들 일행이 숙소를 찾기 위해 두리번거리고 있을 때, 벌써 너댓의 호객꾼들이 갑자기 달려와 매미처럼 떠들어대며 소매를 잡아 당겼다. 변두리 여관에 숙소를 정한 그들은 포장마차를 찾았다.

그러나 골목길까지 뒤져도 응당 있을 것 같았던 포장마차가 보이지 않았다.

번화가와는 뚝 떨어진 골목 초입에 대여섯이 들어 앉으면 몸돌릴 틈도 없이 협소한 실내 포장마차 집을 발견했다.

밤 11시를 넘긴 시각이었다. 꼼꼼하게 살펴보면 승희 또래인 서른 대여섯이나 되었을까. 그러나 얼핏 보면 스물 대여섯의 앳된 티가 가시지 않은 여자가 혼자 가게를 지키고 있다가 벌떡 일어섰다.

이틀을 이곳에서 휴식할 요량으로 찾아와선지 간이 의자를 당겨 목로에 가슴을 붙이고 앉았으려니 가슴 속이 한결 느긋해졌다. 구미에 맞는 국수를 시키고, 꽁치구이 안주를 시키고, 술을 주문하느라 일행은 제 각기 부산을 떨었다.

그즈음에야 철규는 낮에 마신 취기에서 완전히 벗어나 눈자위에 펴져 있던 곤혹스러움이 사라지고 표정이 환하게 밝았다. 승희가 담배를 뽑아물자, 마차 마담이 라이터를 툭 그어 들이댔다.

변두리 선술집 마담은 나이가 많건 적건 좌절과 체념의 경험에서 얻어진 넉살과 무던함이 있어 편안했다. 승희는 문득 주문진에 있는 자신의 가게를 떠올렸다. 간혹 묵호댁에게 전화를 걸어보면 수화기 저쪽으로부터 취객들의 떠드는 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었다.

두잔을 연거푸 들이켰던 승희는 빈 잔을 마차 마담에게 내밀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고있던 그녀도 스스럼 없이 소주잔을 건네 받았다. 라면 한 그릇을 후딱 해치우고 멀건히 앉아있는 형식을 발견한 태호가 면박을 주었다.

"야, 임마. 니 뱃구레 속에는 먹고 또 먹어도 한에 덜 차는 하마가 들어 앉아도 아주 너댓마리가 들어 앉아 있는 모양이다. 거식증이 있다더니, 그렇게 먹어도 끄떡없이 소화시켜내는 니 창자에 경의를 보낸다. 더 먹을래?" 무표정하게 앉아있던 형식은 태호를 외면한 채 고개만 끄덕였다.

저 나이때는 뱃속에 게걸귀신이 들어 앉아있는 법이래요. 마차 마담은 잽싸게 냄비속을 헹구면서 형식을 역성들었다. 마담이 김장김치 한 주발을 내놓았다. 알타리 무를 끄집어내어 으적으적 씹던 철규가 말했다.

그래 잘 왔어. 실컷 먹고 게워내는 불상사가 있더라도 형식이 한 번 먹여주자구. 요상한 짓 저지르지 않는다면 말야. 요상하다는 말을 다른 일행들은 대수롭지 않게 흘려들었지만, 형식은 어인 까닭인지 얼굴을 붉혔다.변씨를 따라간 차마담의 순진한 얼굴이 떠올랐다.

형식이가 한씨네에 합류하고 난 뒤, 두사람 사이는 한결 가까워졌으리라. 진작 등돌리고 말았다는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차마담의 행방술 (行房術) 이 경지에 이르러 변씨를 아금받게 다스리고 있다는 짐작도 가능했다.

그 짐작이 정확하다면 두 사람은 신접살림을 차리는 것까지 생각하고 있을지 몰랐다. 문득 형식이가 측은해졌다. 승희는 빈 잔에 소주를 채워 형식에게 권했다. 형식은 그 소주 역시 가차없이 받아 마셨다. 태호가 말했다.

형식이 임마 데리고 다니다가 군대 보내기 전에 타락시키는 거 아닌지 모르겠네. 벌써 타락한 놈이야. 그렇게 되받은 것은 철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식은 이렇다할 대꾸도 없이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형식을 겨냥해서 빈정거리고 있는 철규가 눈에 거슬렸던 승희는 말머리를 돌릴 심산으로 포장마차 마담에게 슬쩍 물었다. "이 가게 벌인지 오래 되었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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