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취재일기

피랍 교민 구한 대사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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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지난 5일 오전 7시. 인도네시아의 수도 자카르타 공항 인근의 탕그랑 공단. 샌들 제조업체 H사의 사장인 교민 이모(41)씨 집에 괴한 8명이 들이닥쳤다. 이들은 이씨와 그의 사업 동료 임모(41)씨를 끌고나가 차에 태웠다. 납치였다. 납치범들은 H사에 전화를 걸어 몸값 5000달러(약 600만원)를 요구했다. "주지 않으면 오늘 생매장하겠다"고 협박했다.

오전 10시. 자카르타 대사관의 이희성 영사는 탕그랑의 교민 친목회원들한테서 납치사실을 알게 됐다. 영사는 "돈을 주고 조용히 해결하겠다"는 교민들을 "경찰에 연락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 영사는 동시에 H사에 노무현황을 물었다. 직원들은 최근 도박과 싸움을 일삼아 해고됐던 현지인 E씨(30)를 지목했다. E씨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알아낸 이 영사는 현지 경찰에 납치사실을 알리면서 이 정보도 함께 제공했다.

오전 11시30분. 납치범들은 H사 직원에게 "돈을 갖고 공항 인근 쇼핑몰로 나오라"고 요구했다. 이 영사는 "경찰의 출동준비를 위해 최대한 시간을 늦추라"고 충고했다. 경찰 쪽엔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면서 "구출작전을 벌이게 되면 반드시 한국대사관과 협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인질의 안전 문제 때문이었다.

낮 12시15분. 경찰은 쇼핑몰 근처에서 E씨를 체포했다. 나머지 납치범들은 달아났다. 공항 인근 창고에 감금돼 있던 이씨와 임씨는 5시간 만에 무사히 구출됐다. 납치극은 해고에 앙심을 품은 E씨가 사장에게 '보상'을 요구하다 거부당하자 현지 폭력배를 동원해 일으킨 것이다.

이씨는 9일 "대사관이 발벗고 나서주는 바람에 살아났다"고 고마워했다. 14년간 인도네시아에서 산 탕그랑의 교민 친목회원 박모(44)씨도 "그동안 한국 교민에게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번처럼 현지 경찰이 움직이는 걸 본 적이 없었다"고 했다.

납치에 적극 대처하는 인도네시아 한국대사관의 모습이 교민들에게 새삼스러운 감동을 준 것 같다. 외교부가 국민의 신뢰를 되찾는 단순 명료한 방법은 바로 당연하면서도 제대로 실천되지 않았던 교민에 대한 적극적 관심일 것이다.

채병건 정치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