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발전경험 이론으로 만들어 수출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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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현진 학장은 “3년 전 ‘인문학의 위기’ 선언처럼 사회과학, 특히 사회과학 내 기초학문의 위기도 심각하다”고 진단했다.

미국 국립문서기록보관소(NARA) 자료실에선 가끔 의외의 만남이 일어난다. 서로 잘 알고 있는 한국 학자들이 이곳에서 서로를 발견하곤 깜짝 놀라는 것이다.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시점의 미국 정부 자료가 대거 기밀 해제될 때 벌어지는 일이다. 임현진(60)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도 2001년 비슷한 경험을 했다. “여러 분야의 학자가 각자 팀을 이뤄 왔지만 결국 동일한 문서를 복사해 가더라. 엄청한 인력과 돈 낭비다. 일본만 해도 그렇지 않다.” 일본은 국립도서관 등 국가기관이 필요한 자료를 해외에서 일괄 수집해 학자들이 열람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국가 차원에서의 체계적인 학문 지원이 필요한 대목이다.

지난 20일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전국사회과학대학장협의회가 주최한 세미나가 열렸다. 전국 106개 대학의 사회대 학장들이 참여한 협의회는 사회과학 발전을 위한 결의문도 채택했다. 한국 사회과학 육성을 위해 국가 차원의 장기적 발전계획과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는 호소다. 올 5월 출범한 전국사회과학대학장협의회는 윤창호 고려대 정경대 학장과 임현진 학장이 공동 회장을 맡았다.

21일 임 학장을 만나 한국 사회과학의 위기 진단과 발전 방향에 대해 물었다. 그는 “무엇보다 현재 위기에 처한 한국사회에 대한 진단과 처방을 제대로 못 내놓는 사회과학계의 자성을 위해 전국의 학장들이 모인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과학의 위기는 외국 이론의 수입에만 급급한 학계 풍토 때문만은 아니다. 임 학장은 “우리가 서양의 사회과학 이론을 수입해 적용하는 단계에 머물러 있을 때 서구 학계는 오히려 한국 사회를 모델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한국 사회가 서구 사회과학 이론의 원료 공급처가 돼 버렸다는 진단이다.

한국 현대사가 겪은 급속한 경제 발전과 사회 변동은 사회과학계의 이론적 쟁점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한다. 국가 발전에 있어 정부의 개입과 시장의 자율성이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었다면,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발전 경로는 이와 맞지 않는다. 정부가 일정하게 개입하는 ‘지배받는 시장(governed market)’과 같은 새로운 사회학적 개념을 필요로 한다. 임 학장은 “이런 개념은 사실 우리 학계가 만들 수 있는 이론이었다”며 “우리의 발전 경험을 잘 이론화해 내면 한국도 ‘학문 수출국’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전국사회과학대학장협의회는 한국연구재단과 함께 ‘사회과학 지식강국 2020’이란 보고서도 냈다. 2020년까지 한국 사회가 선진국으로 발전하기 위해 필요한 사회과학 발전 방안을 담은 것이다.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사회과학논문인용색인(SSCI) 등재 2395개 저널 중 한국의 사회과학 저널은 5개에 불과하다. 또 국내 대학 전임교수 수(2008년 12월 기준)가 ▶사회과학 1만3037명 ▶인문학 9072명인 데 비해 학술연구지원비 비율은 ▶사회과학 13.7% ▶인문학 23.2%로 오히려 역전돼 있다는 것이다.

임 학장은 “인문학의 위기는 순수 기초학문의 위기를 말하는 것”이라며 “사회과학 분야는 학계 내의 ‘양극화’ 현상 때문에 인류학·지리학·사회학 등 기초학문의 위기가 제대로 부각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사회과학의 위기는 학문 재생산과 교육의 위기란 점에서 ‘대학의 위기’와도 맞물린다. 연구인력이 대부분 해외로 유학 가서 학위를 따오는 학문적 종속현상도 여전하다. 임 학장은 해외 박사의 과잉 현상은 국내에서 공부하기 어려운 여건 탓도 크다고 지적했다. 등록금과 일부 생활비까지 줘가며 연구 활동을 제도적으로 지원하는 외국과 달리, 국내 박사과정에 대한 재정적 지원은 크게 미흡하다는 것이다. 그는 ‘학벌 거품’은 줄이되 전문 연구자들에게는 지원을 강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실용 학문은 전문대학원으로 기초 학문은 일반대학원으로 철저하게 이원화해, 순수 연구자들에 대해선 국가적 지원을 대폭 늘려야 한다는 것이다.

글·사진=배노필 기자

◆임현진 학장=1949년 생. 서울대 사회과학대학장(사회학과 교수). 서울대 사회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미국 하버드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미국 하버드대, 듀크대, 시카고대 등에서 연구와 강의를 했다. 저서에 『한국의 사회운동과 진보정당』 『북한의 체제전환과 사회정책의 과제』 『21세기 통일한국을 위한 모색』 등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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