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기 왕위전 도전기 2국' 평화는 수모를 동반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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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제38기 왕위전 도전기 2국
[제5보 (83~102)]
黑.이세돌 9단 白.이창호 9단

상생(相生)은 내 편의 이익이 아닌 자연에 대한 순응이라 할 수 있다. 적군과 아군의 이분법 아래서 상생이란 말은 대량 포격을 앞둔 일종의 은폐 공작에 불과하다. 바둑판 위의 평화는 몇가지 경우에 찾아온다. 상대의 힘이 두려워 잠시 참고 있거나 서로 해볼 만한 형세라고 보고 소강상태를 이루는 경우다. 유리한 쪽의 부자몸조심도 평화의 한 모습일 수 있다.

고군분투 끝에 공격의 단서를 포착한 이세돌9단이 지금 상대의 교묘한 타개에 지쳐가고 있다. 이창호9단은 84, 86으로 틀을 잡은 뒤 88이란 은근하고도 가시돋친 한수로 이쪽의 갈 길을 묻고 있다. 전쟁이냐, 평화냐. 이세돌은 입술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낀다. 아직 겉은 멀쩡하지만 지금의 형세는 속으로 골병이 심화하고 있는 난국이란 것을 그는 안다. 어렵게 이끌어낸 공격의 약발도 끝나가고 있다. 당장 88의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참고도'처럼 반보 물러서면 평화가 찾아온다. 백은 2를 선수하며 완생하고 흑도 11로 자세를 정비할 여유를 얻는다. 그러나 다음에 남는 A의 급소. 이것이 견딜 수 없는 수모다. 평화는 이처럼 수모를 동반한다.

이세돌이란 젊은 사자에게 89의 반발은 당연한 것이었고 이리하여 92의 절단에 이은 백의 돌파와 102의 뼈저린 급소가격이 일사천리로 이뤄졌다. 흑은 대마가 한눈도 없이 들떠 죽을 지경이지만 우변의 실리를 한사코 확보했고 백의 완생도 결사적으로 막았다.

곧 파도 같은 전면공격이 밀려올 것이다. 성패는 운에 맡길 수밖에 없다고 이세돌은 생각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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