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년 달라진 정가지도]의원 37명 '양지찾아 與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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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올해 국회는 의원들의 당적이동이 유달리 많았다.

여야 첫 정권교체에 따른 권력 대이동의 산물이다.

'정계개편' 이란 이름 아래 무려 34명의 의원들이 소속정당을 바꿨다.

물론 야당에서 여당으로 이동한 케이스가 33명으로 거의 전부다.

나머지 한명은 국민신당 해체후 무소속 (韓利憲의원) 을 택했다.

여당행 1호는 국민회의 이석현 (李錫玄) 의원. 대선 전 '남조선명함' 파동의 책임을 지고 탈당해 무소속이 된 그를 2월 국민회의가 다시 불러들인 것. 친정 복귀 성격인 李의원의 국민회의 재입당이 있고난 뒤부터 한나라당의원들의 여당행이 줄을 이었다.

4월 3일 김종호 (金宗鎬).박세직 (朴世直) 의원이 탈당해 자민련으로 옮긴 것을 신호탄 삼아 모두 26명의 한나라당 의원들이 여당으로 보따리를 쌌다.

국민회의로 18명, 자민련으로 8명. 집권초 김종필 (金鍾泌) 총리의 국회 임명동의가 좌절된 것을 기화로 여소야대 (與小野大) 국회구조 타파를 시도한 김대중 (金大中) 정부의 적극적인 영입전략의 소산이다.

야당의원들의 여당행은 시기로 보아 두 단계로 나누어진다.

6.4 지방선거를 앞둔 두달, 그리고 정기국회를 전후한 5개월이다.

여권의 영입이 정치일정과 연관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지방선거를 앞두고 인천지역 3명을 포함한 8명의 수도권.충청권 의원을 영입, 수도권에서의 승리무드를 일궈냈고 추가 영입으로 정기국회에서 야당에 의한 발목잡히기에서 벗어났다.

여권, 특히 국민회의는 이후 서서히 동쪽으로 눈을 돌렸다.

'전국정당 구축' 을 위한 동진 (東進) .8월 29일 국민신당과의 합당을 통해 처음으로 부산의 김운환 (金운桓).서석재 (徐錫宰) 의원을 맞았다.

여소야대 구조는 결국 9월 4일 깨졌다.

8월 31일 한나라당이 전당대회에서 이회창 (李會昌) 총재를 선출하면서 경기.강원지역 의원들의 여당행이 줄을 이었고 김충일 (金忠一) 의원이 국민회의로 입당하면서 공동여당 의석이 1백47석 (한나라당 1백46석) 이 됐다.

겉으로는 "인위적인 정계개편은 없다" 면서도 국민회의.자민련 공동여당간 영입경쟁은 치열하게 전개됐다.

국민신당과 국민회의의 합당과정에서 金총리가 자신의 지역구 (부여) 까지 내놓으며 신당 출신 김학원 (金學元) 의원을 낚은 것이 대표적 사례. 하지만 지방선거전 10명의 한나라당 의원이 '6 (국민회의) 대 4 (자민련)' 의 비율로 갈린 반면 이후에는 '8 (18명) 대 2 (5명)' 로 국민회의의 영입이 압도적이었다.

여당의 의석수 불리기엔 양지 (陽地) 를 좇는 정치인들의 철새성향도 크게 작용했다.

15대 총선 이후 2년여동안 정당별 의석수의 변동을 보면 이같은 성향은 그대로 나타난다.

총선 (96년 4월 11일) 으로 이뤄진 의석수는 ▶신한국당 1백39 ▶국민회의 79 ▶자민련 50 ▶민주당 15 ▶무소속 16명. 이같은 구조는 지난해 대선 직전인 12월 17일 현재 ▶한나라당 1백65 ▶국민회의 78 ▶자민련 43 ▶국민신당 8 ▶무소속 5명으로 바뀐다.

당시 여당이던 한나라당이 1년반만에 26석을 키운 것이다.

정권이 바뀌자 같은 만큼의 한나라당의원들이 여권으로 역류한 셈이다.

여권의 야당의원 영입은 새해에 오히려 본격화될 게 분명하다.

더 큰 틀의 정치권 구도변화를 요구하는 내각제 개헌문제가 기다리기 때문이다.

DJP 공동집권 1주년 기념식에서 김대중대통령이 "여소야대에서 여대야소를 이룬 것이 양당의 가장 큰 성공" 이라고 말한 점도 새겨볼 대목이다.

김석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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