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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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7장 노래와 덫 ④

성민주를 맞이하러 나갔던 한철규는 밤 늦도록 민박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처음부터 숙소에 남아 있기로 작정하였던 승희는 밖에서 저녁을 먹자는 태호와 형식의 권유를 뿌리쳤다.

그러나 외식을 하러 나갔던 그들이 집으로 돌아온 밤 11시까지 철규는 숙소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렇지만 세 사람 중 어느 누구도 철규의 늦은 귀가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때 변씨가 있었더라면, 뭔가 돌파구를 찾아 낼 수 있었을 것이었다.

참담하고 곤혹스러웠으나 그들은 입을 꿰매버린 듯 말이 없었다.

형식이가 옷을 입은 채로 누워 잠이 들었다.

승희는 또 다시 시계를 보았다.

이런 무료를 달랠 수 있는 방법은 장부를 꺼내고 구입과 매출을 맞춰 보며 시간을 끌어 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 역시 초저녁에 마무리한 상태였다.

태호에게 긴장되어 있는 자신의 모습이 들통나는 게 싫었다.

그래서 형식이가 벗어 둔 방한복을 꺼내 바느질거리를 찾았으나 그 역시 시들해서 놓아 버렸다.

자신이 저녁밥까지 굶어 가며 이토록 긴장할 까닭도 명분도 없었다.

태호가 눈치챌까 두렵고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 역시 진작 눈치채고 있을 것도 분명했다.

술이라도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 술이야말로 금물이었다.

온갖 푸념과 넋두리가 술의 힘을 빌려 입밖으로 쏟아질 게 분명했다.또 그런 꼴을 철규가 발견할 경우 자신은 얼마나 왜소한 몰골의 여자로 전락하고 말 것인가.

지금까지 추슬러온 자신의 자존심을 삽시간에 무너뜨리고 말 것도 분명했다.

그렇다고 울어 버릴 수조차 없었던 그녀는 고물 텔레비전 수상기에 무의미한 시선만 고정시키고 있었다.

벌써 두 시간째 채널을 돌려 가며 연속극만 보고 있었지만, 줄거리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누나 안 잘거예요? 어디선가 태호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피곤하면 자. 그렇게 건성으로 대꾸하는 승희의 시선은 여전히 수상기에 꽂혀 있었다.

누나 우리 가게 간판은 하늘인 거 알어? 그제서야 승희는 벽에 기대 앉아 태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우리 간판? 문득 그런 생각이 드네. 가게마다 간판들이 있잖어. 그렇다면 우리 가게의 간판은 한씨네 하늘상회란 거.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글쎄 나도 왠지 허탈한 모양이지. 나 옛날에 소매치기한 경험도 있거든. 사람들이 주머니나 핸드백을 몽땅 털려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절망적인 표정들이 갑자기 떠오르네. 그땐 그들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면, 온몸에 갑자기 전류가 흐르는 것 같은 흥분을 느꼈었어.

동정심도 아니었고 연민도 아니었어. 그런 기분에 중독되어 저지르고 싶은 충동을 버릴 수 없었어. 그런데 오늘밤은 내가 소매치기당한 기분이야. 태호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진지해지자, 승희는 손가락을 서둘러 입에 갖다 대며 눈으로는 누워 자는 형식을 가리켰다.

아냐 이 자식도 대충은 알아. 내가 말해 줬거든. 승희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그 기분 나도 짐작할 만해. 그러나 이슥했던 12시쯤, 승희는 민박집 골목 어귀로 들어서는 철규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다.

귓결로 알아채기는 먼 거리였지만, 그의 발걸음소리가 틀림없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주듯 어느새 방문이 드르륵 열리면서 철규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억병으로 취해 있었다.

냉큼 들어서지 않고 문지방을 밟은 채 그윽한 시선으로 방안을 굽어보는 그의 시선은 취기로 흩어져 있었다.

그때 그는 갑자기 두 팔을 위로 올려 뻗으며 소리질렀다.

햐 - 우리 식구들 여기 다 모여 있구만. 그런 줄 모르고 한참 동안 찾아 헤맸잖아. 그리고는 방안으로 상반신을 한 번 휘청하는가 하였더니,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잠자던 형식이까지 일어나 호수에 빠진 사람 건져내듯 가까스로 취한 몸뚱이를 방안으로 끌어다 눕히는 데 성공하였다.

승희가 그의 입가로 흘러내리는 침버캐를 손수건으로 얼른 훔쳐 주고 있는데, 숨을 몰아쉬던 태호가 뇌까렸다.

"씨발. 나도 지독하게 맵고짠 이별 한번 해봤으면 소원이 없겠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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