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균의 뉴욕에세이]밉지않은 자선단체 '뇌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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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미국에서 살다보면 매일 산더미처럼 쌓이는 우편물 때문에 질릴 때가 많다.

요즘 같은 연말.연시에는 더욱 그렇다.

각종 고지서.통지서.판촉물 전단에다 업무상 구독하는 신문.잡지, 취재 유관기관에서 보내오는 안내문 등을 보태면 금세 수십종이 된다.

이를 뜯어서 읽어보고 버릴 것, 보관할 것, 즉시 처리할 것, 그렇지 않은 것 등으로 가르는 작업이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우편물더미에 약방의 감초 격으로 끼여 있는 것이 사회.자선단체에서 발송하는 기부요청서다.

당뇨병.암.심장병.선천성 기형아 치료단체에서부터 상이군인.미혼모.태아.빈민 구호단체에 이르기까지 아주 다양하다.

우리 집에 가장 열성적으로 기부요청서를 보내오는 곳은 낭포성 섬유증 (cystic fibrosis) 환자 지원단체다.

대체로 3개월 간격으로 한번씩 보내온다.

덕분에 이 병이 미국에서 가장 흔한 치명적 유전질환이며, 현재 3만여명이 고통받고 있고, 지속적 기침과 씨근덕거리기, 피부의 짠맛 등이 대표적 증상임을 알게 됐다.

이들의 기부요청서는 구호 대상자들이 처해 있는 딱한 상황, 자신들의 사업내용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과 함께 보통 10달러, 15달러, 20달러, 혹은 그 이상 가운데 하나를 택해 기부를 해주도록 호소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한가지가 더 포함돼 있게 마련이다.

기부요청을 받는 사람의 이름.주소가 적힌 예쁜 스티커 (1백장쯤) 나, 작은 카드 (5~10장) 같은 게 동봉돼 있는 것이다.

공과금을 주로 개인수표로 납부하고, 작은 일에도 흔히 감사편지를 보내는 미국인들에게는 제법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물건들이다.

이런 '뇌물' 을 받고도 기부요청을 묵살해버리기는 사실 그리 쉽지 않다.

한두번쯤은 버텨보더라도 우편물 수납함 한 구석에 차곡차곡 쌓이는 스티커를 바라보노라면 결국은 지는 수가 많다.

'유쾌한 굴복' 인 셈이다.

우리나라 단체에도 한번쯤 권해볼만한 애교가 아닌가 싶다.

김동균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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