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병사 '북한판 병영일기' 펴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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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선 병역청탁으로 특별배치 받은 병사를 '부탁자'라며 우대합니다. 또 근무여건이 좋기로 소문난 개성지역의 민사행정경찰로 복무할 경우 '신(神)의 민경'이라고 부르죠."

2002년 2월 19일 서부전선 군사분계선을 넘어 도라전망대로 귀순했던 북한군 상급병사(병장) 출신의 주성일(23)씨. 그는 9일 자신의 군생활 체험과 탈북을 다룬 책을 펴냈다. 그의 수기 'DMZ의 봄'(시대정신 발간)은 국내에 소개된 첫 북한판 병영일기인 셈이다. 주씨는"남한에도 병역비리가 있고 면제자를 '신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듣고 남북이 비슷하다는 생각에 놀랐다"고 말했다.

주씨는 조지 부시 미 대통령이 도라산역을 방문하기 몇 시간 전 넘어와 '위장귀순'의혹을 받기도 했다. 그는 후임병 '탁은혁'과 함께 귀순을 시도했고, 탁씨는 그만 고압철책에 걸려 숨졌다. 그래서 주씨는 그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지금까지 탁은혁이란 이름으로 지내왔다. 하지만 책 출간을 계기로 자신의 이름을 찾기로 했다.

주씨의 책에는 개성지역 2군단 6사단에서 6년간 사단장연락병과 대남방송 조장으로 근무하며 겪은 일들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관계당국이 귀순 당시 남측 병사들이 졸고 있었던 사실을 쓰지 말라고 해 뺐다"고 귀띔했다.

특히 그는 1999년 봄 김정일 위원장의 전방부대 방문 목격담을 담았다. 비상경계인 '폭풍'조치가 내려진 가운데 몇달 전부터 훈련을 한 뒤 김 위원장을 맞았는데 정작 북한TV에는 방문날짜도 다르게 나오고 병사들의 시범 장면도 미리 촬영한 것을 썼다는 얘기다. 김 위원장의 부인으로 알려진 고영희가 함께 와 당간부 자제들로 구성된 민경부대 병사를 위로한 사연도 적었다.

개성박물관까지 약탈할 정도로 드세던 골동품 밀매상을 없애기 위해 군 특수부대로 구성된 '골동제압조'로 활동하던 일, 97년 황장엽 씨 망명 직후 황씨의 6촌인 상관이 죽음에 이르게 된 사연, 병사를 대상으로 매춘을 하던 여성들이 공개처형당한 이야기도 소개한다.

비행연대장(상좌.우리의 대령)인 아버지와 군장교인 어머니 사이에서 유복하게 자란 그가 귀순을 택한 것은 대남방송 사고 때문이다. 후임병 탁은혁이 남한방송을 녹음해 둔 테이프를 실수로 대남방송에 틀어버리는 바람에 문책이 두려워 휴전선을 넘게 된 것. 주씨는 "나 때문에 고초를 겪을 부모님에 대한 죄책감이 가슴을 짓누른다"고 말했다.

주씨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2학년생이다. 월 52만원의 정부 보조금을 받아 아파트 임대료 등을 내고 남은 20만원으로 산다. 그나마 이달부터 보조금이 33만원으로 줄었다. 그는"단벌인 나한테 '일주일 내내 그 옷이냐'고 핀잔주는 친구가 제일 야속하다"고 말했다. 방학을 맞은 그는 요즘 판문점에서 외국인 관광안내 아르바이트를 한다. 남북관계를 다루는 기자가 되겠다는 주씨는 "이 책의 원고료 100만원이 생활에 큰 보탬이 될 것"이라고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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