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대통령 "가장 협조할 나라는 중국 아닌 미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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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가장 긴밀하게 협조해야 할 나라는 중국이 아니라 미국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발언이다. 지난달 9일 부시 미 대통령의 친서를 들고온 콘돌리자 라이스 국가안보보좌관에게 한 말이다. 중국의 고구려사 왜곡 문제가 국가적 쟁점으로 떠오른 9일 여권의 고위 관계자는 노 대통령의 이 같은 비공개 발언을 공개했다.

그는 "당연한 말 같기도 하지만 그동안의 여권 기류를 감안할 때 대통령의 발언은 의미심장하다"고 설명했다. 당장 집권당 의원들의 생각과 다르기 때문이다. 지난 4월 총선 직후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 결과는 미국보다 중국이 더욱 중요한 외교 상대국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지난해에는 일본을 방문한 노 대통령 자신이 앞으로 우호관계를 돈독히 해야 할 나라로 일본을 먼저 꼽고 그 다음은 중국이라고 말한 적도 있다. 중국보다 미국이 중요하다는 발언은 따지고 보면 집권세력 내에선 처음 나온 것이다.

노 대통령은 라이스 보좌관과 1시간30분여 동안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눴다고 한다. 노 대통령이 먼저 "최근 많은 사람이 우리나라가 중국과 더 긴밀하게 협조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데 그렇지 않다"고 운을 뗐다. 노 대통령이 말한 '많은 사람'은 열린우리당 의원들을 지칭한 듯하다.

노 대통령은 이어 "국제사회에서 가장 긴밀하게 협조해야 할 나라는 미국"이라고 강조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이에 "감사하다"고 화답했다고 한다.

노 대통령의 발언이 단순히 립 서비스 차원은 아닌 듯하다. 노 대통령은 라이스 보좌관에게 이런 말도 덧붙였다. "어떤 경우에는 중국과 일본이 군비 경쟁을 벌이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노 대통령이 생각하는 미국을 중시해야 하는 진짜 이유일지도 모르는 대목이다. 노 대통령의 발언을 전한 고위 인사는 이를 이렇게 풀이했다.

"북핵 문제 등 산적한 남북 문제의 진행 상황에 따라 한반도 주변국들이 군비 경쟁 등 자국의 이익을 추구하고 나설 가능성에 대한 경계심을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그래서 차라리 지리적으로 먼 미국과의 관계를 공고히 해야 한다는 것이 대통령의 실용주의, 국익 우선 외교 노선과 맞아떨어진다는 것이다.

한편 노 대통령은 라이스 보좌관과 주한미군, 북한 인권 문제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해서도 의견을 교환한 것으로 전해졌다. 노 대통령은 "비가 올 때는 우산의 소중함을 모두 알지만 비가 그치면 소중함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있다"며 우산에 빗대 전쟁억지력으로서의 주한미군의 역할을 평가했다. 또 주한미군 감축 및 기지 이전 등의 협상에서 우리 정부가 미국 측의 입장을 전향적으로 수용한 것에 대해 " 미군이 적은 비용과 부담으로 주둔하면서 두 나라가 오랜 기간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고 말했다.

북한의 인권 문제와 관련해선 보다 솔직한 속내를 드러냈다. 노 대통령은 "내가 인권변호사 출신인데 북한의 인권 문제에 관심이 없을 수 있겠느냐"며 "그러나 인권 문제를 강압적으로 해결하려 할 경우 북한에 더욱 큰 인권 문제가 야기될까 우려돼 신중한 입장을 취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라이스 보좌관은 대통령 입장에 공감을 표시하면서 "미국이 전 세계의 인권수호국으로 북한 인권 문제를 거론하지 않을 수 없음을 양해해 달라"고 말했다고 소식통은 전했다.

김정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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