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흐르듯 사람을 끌어들이는 ‘열린 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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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김동진 소장이 설계한 서울 청담동의 근린생활시설 ‘바티리을’(지하 1층, 지상 6층). 외부에 개방된 계단과 테라스로 ‘개방성’을 높여 임대효율을 잃지 않으면서도 주민들이 편안하게 다가갈 수 있도록 했다. 김 소장은 지난해 젊은건축가상(문화체육관광부)·한국건축가협회상·강남구 아름다운 건축상을 수상했다.

오랫동안 마음에 그리던 집을 실제로 짓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단순한 꿈이 아니라 실제로 하얀 종이를 앞에 놓고 마당부터 방과 마루, 부엌을 그려보는 순간은 생각만해도 가슴 설레는 일이다. 하지만 너무 꼼꼼한 건축주는 설계를 맡을 건축가에게 부담, 혹은 고통이 되기도 한다. 바라는 것을 명확하게 밝히는 것을 넘어서 요구사항이 많은 이들은 집이 다 지어진 후에도 만족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김동진 소장(41·로디자인·홍익대 건축공학부 조교수)은 역으로 그런 건축주를 만나 함께 작업한 것을 즐거운 경험으로 여기는 사람이다. “건축주를 만나 살아온 얘기를 들으며 그가 원하는 집을 함께 그리는 일 자체가 설계의 중요한 ‘과정’입니다. 건축가가 잘해야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바로 귀를 기울이는 것이죠.” 그래서일까. 김 소장이 디자인한 건물은 주택이든, 오피스빌딩이든 ‘배려’라는 개념을 자연스럽게 실현해 보였다는 점에서 닮아 있다.

◆마당으로 열린 집=“어느 날 건축주를 처음 만났는데, 모눈종이 위에 정성스레 그려온 평면도가 인상적이었어요.”

성북동 주택(스칼렛 테르·2007)의 밑그림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는 집주인 부부 뿐만 아니라 함께 살게 될 자녀들과도 만났다. 그 집에 살 ‘사람’과 닮은 집을 짓기 위해서였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어진 이 집은 마당에서 건물이 수평으로 이어진다. 식탁이 놓인 부엌도 전면 유리창으로 마당을 향해 열려있고, 천장이 2층까지 트인 한쪽 마루 역시 외부의 테라스와 잔디까지 같이 높이로 이어지는 풍경이 독특하다. “자연에 애정이 많은 주인을 위해 마당을 집안으로 끌어들여오는 효과를 내고 싶었다”는 설명이다.

이 집에 열린 것은 또 하나 있다. 옹벽 기능을 하는 담장을 제외하고 나머지 부분은 바깥에서 건물을 관통해 멀리 도시풍경이 보이도록 목재 루버를 사용해 길로부터 ‘담’을 열어놓았다.

“성북동 주택들이 아름다운 정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담을 높게 쌓은 풍경이 안타까웠습니다. 프라이버시를 침해 받지 않으면서도 지나는 사람과 풍경을 공유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싶었어요.” 열어놓은 담장은 간결하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도 눈길을 끈다.

◆소통을 위한 ‘배려’=청담동의 근린생활시설 ‘바티리을’(2008)도 현대적인 감각이 단연 돋보인다. 누군가 이 건물의 역동적인 형태가 ‘멋’을 위한 것이라고 우겨도 반대할 사람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김 소장은 “건축은 외피가 아니라 내부 공간에서 나온다”며 “내부공간의 수직적 관계를 보여주는 단면과 더불어 가장 염두에 둔 것은 주민이 편안하게 드나드는 공간을 만드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엘리베이터를 뒤로 숨기고, 바깥으로 노출시킨 계단과 테라스 덕분에 건물은 가로로부터 ‘열린 공간’이 됐다. 주민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건물로 들어가고, ‘단절됐다’는 느낌 없이 위층으로 올라가도록 하기 위해 숱하게 고민한 결과였다.

“흔히 상가 건물에 들어가면 바로 엘리베이터 문을 만나죠. 건물은 길에서 고립되고, 각 층이 끊어져 있는 느낌입니다. 충분히 고민하면 아름다우면서도 길과 건물, 층과 층, 상점과 주민이 소통할 수 있는 주거민을 위한 근린생활시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김동진 소장은 홍익대 건축학과, 파리-벨빌 국립건축대학을 나왔다. 그가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쓴 단어는 ‘관계’와 ‘자연스럽게’였다. “건축을 처음 공부하던 시절엔 ‘유행’ ‘최첨단’에 민감하던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정말 중요한 것은 ‘맥락’이고 ‘관계’라는 것을 알게 됐죠.”

그는 요즘 광운대 캠퍼스 안의 ‘광운포럼’ (설계 현상공모 1등 당선)설계에 주력하고 있다. “캠퍼스의 새 건물을 중심으로 기존 건물들과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 캠퍼스와 이웃 주민과의 관계를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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