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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실용적 해법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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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미국이 10년 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된 이래 워싱턴은 패권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미국이 탄생할 때부터 제국주의에 저항했다는 사실을 잊은 채 말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목표는 침략국인 독일과 일본을 물리치는 것이었고 그 다음은 연합국의 일원인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이었다. 그래서 미국은 영국에 대한 지원을 제한했다. 로버트 스키델스키가 쓴 경제학자 존 케인스의 전기를 보면 당시 미국의 태도가 얼마나 완강했는지 알 수 있다. 영국은 미국의 지원을 얻기 위해 제국으로서의 여러 이익을 포기해야 했다는 흥미로운 내용이 담겨 있다. 전시 때의 우방들은 냉전으로 인해 양극으로 갈라졌다. 양극 체제는 처음에는 위험해 보였지만 결국 안정적인 것으로 입증됐다. 소련이 마침내 붕괴됐을 때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이 됐다.

패권국가로서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를 염려한 이들도 있었다. 9.11 테러가 일어나자 수정주의 역사학자들과 조지 W 부시 행정부 내의 친(親)이스라엘파들은 이라크를 수중에 넣어 중동을 지배하는 기지로 삼자고 주장했다. 이들은 미국이 불량국가들을 다스리려면 채찍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계의 질서가 미국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미국이 없다면 21세기 국제사회는 유럽 국가들이나 일본.이란 등의 재무장, 한반도 전쟁, 무분별한 핵확산 등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얘기였다. 이는 지미 카터 대통령 시절 국가안보보좌관이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가 경고한 내용이었다. 부시 행정부 내의 브레진스키 계승자인 콘돌리자 라이스는 다극(多極) 체제가 항시적인 전쟁 요인이 된다고 주장했다. 라이스는 미국이 이끄는 민주주의 세력이 국제사회를 주도할 때 평화가 보장된다고 했다.

이 같은 미국의 역할에 대한 논의는 이라크 침공 전에 활발했다. 미국이 원하는 것은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굳건한 믿음이 그 기반이었다. 그러나 이라크 침공 후 갈수록 더해가는 폭력 사태와 저항은 미국의 권능에 대한 국제사회의 믿음을 송두리째 흔들어 왔다. 세계적인 금융역사학자인 니알 퍼거슨은 이라크 침공을 지지하고 19세기 영국의 식민지 통치시대를 일컫는 '팍스 브리태니카'를 이어받는 '팍스 아메리카나'를 바랐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미국의 이라크전 승리 이후 이어진 일련의 끔찍한 사태에 환멸을 느꼈다.

그는 미국은 패권을 성공적으로 행사할 자질이 부족함은 물론, 근본적 결점을 갖고 있으며 머지않아 국제적인 지배력을 잃게 될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포린 폴리시'지 최근호에 기고한 글에서 미국의 야심을 좌절시킬 세 가지 구조적 결함을 꼽았다. 그것은 외국 자본에 대한 지나친 의존, 적절치 못한 군사력 사용, 장기적 목표들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내는 능력 부족 등이다. 퍼거슨은 제국이 쇠퇴하고 광신주의가 활개치며 경기가 침체되는 등 무정부적인 상황이 닥칠 것이라고 내다본다. 이는 세계를 주도할 세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한다.

중국은 경제적.정치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유럽은 너무 노쇠하고 중동은 여러 면에서 뒤떨어져 있다. 세계는 권력공백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이다.

지난 10년간 워싱턴은 문명 간의 충돌이나 역사의 종말 등 거대 담론에 대해 주로 이야기해 왔다. 그러나 워싱턴은 미국이 몸담고 있는 세계에 대한 작고 실용적인 해법을 배우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중동의 종교사와 사회구조, 인류학과 문명,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충돌 사태의 본질, 그리고 미국이 원래 제국주의를 거부했었다는 사실 등을 말이다.

윌리엄 파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 칼럼니스트
정리=기선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