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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 이후 ‘이승만 깎아내리기’ 90년대 들어 공적 재평가 활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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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1면

“지금 우리나라를 새로이 건설하는 데 있어서 아까 김구 주석의 말씀대로 튼튼한 반석 위에다 세우려는 것입니다.” 이승만이 1945년 11월 28일 김구와 함께 정동예배당에서 행한 강연에서 한 말이다. 그러나 두 민족 지도자는 같은 길을 걷지 않았다. 이승만은 46년 6월 3일 전북 정읍에서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했다. 48년 2월 미군정이 5월 10일 총선거를 통해 단정 수립을 공포하기 훨씬 전에 나온 이 정읍 발언으로 인해 그는 남북분단을 앞장서서 이끈 ‘역사의 죄인’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반면 김구는 48년 4월 19일 남한만의 총선거에 반대해 남북이 하나 되는 통일정부 세우기를 꿈꾸며 38도선을 넘었다. 실패로 끝났지만 그는 통일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족지도자로 우뚝 섰다. 그러나 이승만은 60년 4·19혁명에 의해 권좌에서 내려오기까지 12년간 장기 집권했기 때문에 민주화에 역행한 독재자라는 딱지도 붙이고 말았다. 그는 그때까지의 공적을 무화시키는 구인공휴일궤(九仞功虧一簣)의 우(愚)를 범하고 말았다.

서울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세워진 지 4년 만인 60년 8월 19일 모습을 감추었다. 동상 기단부의 비문도 무사할 수 없었다.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가 정을 내리칠 때마다 그의 공적은 하나 둘 지워져 갔다(사진=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 그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김구의 동상이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정읍 선언 4달 전인 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졌음이 알려지면서 이승만은 당시 소련의 팽창정책과 북한 정권의 실체를 꿰뚫어 본 혜안을 가진 정치가라는 평을 얻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와 다원화된 풀뿌리 시민사회를 자력으로 일구어 낸 오늘 그 초석을 놓은 이가 이승만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건국의 아버지’라는 호평과 민족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시대착오적 독재자였다는 혹평이 마주치는 지금. “되도록이면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앞서서 고민한 올곧은 지식인 천관우의 고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