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남산의 이승만 동상은 세워진 지 4년 만인 60년 8월 19일 모습을 감추었다. 동상 기단부의 비문도 무사할 수 없었다. 석공의 손에 들린 망치가 정을 내리칠 때마다 그의 공적은 하나 둘 지워져 갔다(사진=대한민국정부 기록사진집). 그의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김구의 동상이 들어섰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소련군 점령지역에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수립하라”는 45년 9월 20일자 스탈린의 지령에 의해 정읍 선언 4달 전인 46년 2월에 사실상 정부에 해당하는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세워졌음이 알려지면서 이승만은 당시 소련의 팽창정책과 북한 정권의 실체를 꿰뚫어 본 혜안을 가진 정치가라는 평을 얻게 되었다. 경제적 풍요와 다원화된 풀뿌리 시민사회를 자력으로 일구어 낸 오늘 그 초석을 놓은 이가 이승만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민족의 독립과 번영의 기초를 다진 ‘건국의 아버지’라는 호평과 민족통일을 저해하고 민주주의를 압살한 시대착오적 독재자였다는 혹평이 마주치는 지금. “되도록이면 좋은 점을 발견하는 아량과 관용으로, 플러스와 마이너스를 총결산해서 플러스 편이 크면 우선 긍정적으로 평가해 놓고, 그 테두리 안에서 흠을 말하는 것이 좋다.” 역사적 인물의 공과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를 앞서서 고민한 올곧은 지식인 천관우의 고언이 가슴에 와 닿는다.
허동현(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