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대그룹 구조조정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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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재벌개혁' 이냐, '재벌해체' 냐.

7일 정.재계 간담회에서 나온 '5대그룹 구조조정추진 합의문' 은 이런 논란을 불러일으킬 만큼 전례없는 내용들을 담고 있다.

우선 5대그룹은 각각 3~5개의 주력업종 중심으로 구조를 개편함으로써 계열사 수를 현재의 절반 수준으로 줄이고 비주력 계열사나 사업부문 매각 등을 통해 20조원 규모의 자구노력을 편다고 밝혔다.

이유야 어찌됐든 기회만 있으면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하고 관련 기업을 양산해왔던 기존의 성장전략을 생각할 때 이는 생각키 힘든 변화다.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이런 과정에서 벌어질 재벌구조의 근본적인 변화다.

이와 관련해 주목되는 것은 정부와 재계가 마련한 이번 합의문중 특히 '전문 (前文)' 이다.

전문은 우선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는가가 아니라 국민들과 국제경제사회가 인정할 만큼 실질적으로 달라지고 있는가가 중요한 시점' 이라며 구조조정과 관련한 5대그룹의 미온적인 자세를 질책하고 있다.

또한 과거 30여년간 고도성장 과정에서 5대그룹의 공은 인정하면서 더 이상 과거와 같은 사업.재무구조와 경영방식을 유지할 수는 없다고도 지적했다.

내용은 합의문이 돼 재벌 입장에서 보면 '반성문' 이고 정부 입장에서는 재벌개혁을 구체적으로 채찍질해나가면서 궁극적으로 현재의 재벌구조를 뜯어고치겠다는 뜻을 분명히 담고 있는 '경고문' 에 가깝다.

간담회에서 金대통령은 이런 뜻을 더욱 분명히 했다.

金대통령이 말한 것은 크게 두가지다.

우선 "개혁에 힘쓰지 않고 국제경쟁에서 이겨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 기업에 대해서는 국민을 위해 묵과할 수 없다" 는 것이다.

그러면서 '은행부실을 털기 위한 64조원이 국민부담으로 지출됐다' 는 것을 상기시켰다.

아울러 "외국에선 능력이나 적성이 없는데도 경영을 한다는 것은 아득한 옛 이야기" 라며 국내기업들의 반성과 시정을 촉구했다.

'국민부담' 과 '국제기준' 이라는, 누구도 반발하기 힘든 두가지 논리로 재벌을 압박한 것이다.

정부가 재벌구조를 바꾸는데 있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수단은 상호채무보증 해소다.

정부와 재계는 우선 올해안에 다른 업종 계열사간, 2000년 3월까지는 같은 업종 계열사간의 상호채무보증을 완전히 해소한다는데 합의했다.

이는 결국 현재 상호지보와 출자 등의 관계로 얽혀 있는 재벌구조를 일단 소그룹으로 분할한 뒤 (이업종간 채무보증해소) , 개별기업 단위로 재편성 (동업종간 채무보증해소) 하겠다는 의미다.

물론 그 후 지주회사 설립허용 등을 통해 새로운 '연합' 관계를 허용할 뜻을 내비치고는 있지만 정부가 구상중인 재벌개혁의 기본구도는 어찌됐든 기존의 재벌구조와는 판이한 형태의 소유.지배구조로 탈바꿈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다시 말해 한국 재벌구조의 특징인 '선단식 경영' 체제와 복잡한 상호보증.출자 관계를 통해 오너가 지분율 이상의 경영권 행사를 하는 것은 제도적으로 차단될 수밖에 없다.

현재 정부가 밝히고 있는 그림은 소그룹내의 상호채무보증이 해소되는 2000년 4월부터는 현재 재벌구조가 '느슨한 독립기업 연합체' 형태를 띠게 된다는 것까지다.

이후의 형태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계열사간 상호출자를 어떻게 없애느냐가 앞으로 연구할 과제" 라며 "지주회사를 통한 지배는 궁극적으로 가야 할 방향이지만 아직 정부내에서 깊숙한 논의는 없는 상태" 라고 말했다.

한편 구체적인 사업구조 조정에 대해 정부는 상당한 향후 이행계획을 갖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헌재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이 기자간담회에서 '추가 빅딜이 있을 수 있다' 고 밝힌 것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이와 관련, 한 정부 고위관계자는 삼성자동차와 대우전자의 사업맞교환을 주목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 사안은 앞으로 이어질 이업종간 '진짜 빅딜' 의 신호탄이라는 해석이다.

아울러 현재 진행중인 7개업종의 빅딜 외에도 철강.PCS.케이블TV 등에서도 또 다른 빅딜이 있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앞으로 국내 산업지도를 바꾸는 구체적인 사안들이 계속 터져나올 것임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주목해야 할 것은 앞으로 대통령이 직접 정.재.금융계 간담회를 매분기 열어 합의문 이행상황을 점검하고 이를 공개하겠다고 한 대목이다.

이는 재벌들에는 엄청난 '무언의 압력' 으로 작용할 것임에 틀림없고 정부는 이를 담보로 확실한 재벌개혁을 이뤄내겠다는 생각인 것으로 보인다.

고현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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