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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벨트 해제 매뉴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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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2면

엊그제 이명박 대통령의 8·15 경축사를 둘러싼 해프닝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획기적인 서민주택 정책을 강구 중”이라고 했다. 당연히 언론의 관심이 쏠렸다. 청와대 관계자는 “그린벨트에 짓는 보금자리 주택을 늘린다는 얘기”라고 설명했다. 그는 “이를 위해 비닐하우스나 축사·창고 등이 지어진 서울 근교의 그린벨트를 대부분 해제할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이를 시장에선 ‘그린벨트 추가 해제’로 해석했다. 이튿날 청와대는 공식 발표를 통해 “현재로선 그린벨트 추가 해제는 없다”고 못 박았다. 국토해양부 장관도 “검토 중인 게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장은 이미 그린벨트 추가 해제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한 부동산 전문가는 “강남을 대체할 수 있는 하남·구리·서초 등을 놓고 따져보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로선 곤혹스럽겠지만 시장의 반응은 당연하다. 시장은 정부의 그간 행적과 고민을 읽고 거기에 맞춰 반응했을 뿐이다.

이명박 대통령은 수시로 그린벨트 해제를 얘기했다. 올 2월엔 “서울 근교의 그린벨트에는 비닐하우스만 가득 차 있다”며 “신도시를 먼 곳에 만들어 국토를 황폐화시킬 필요 없이 이런 곳을 개발해야 한다”고 했다. 대통령과 ‘정책적 동일체’로 불리는 강만수 전 기획재정부 장관의 톤은 더 높았다. 그는 “집 없는 사람에게 그린벨트는 분노의 숲”이라며 “그린벨트를 해제하고 그 자리에 서민을 위한 집을 지어야 한다”고 했다.

게다가 요즘 뛰는 강남 집값은 정부로선 공포, 그 자체다. 경제에 나쁜 영향을 주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정권의 화두인 친서민 행보를 가로막는 최대 적이기 때문이다. 집값이 급등하면 가장 고통받는 게 서민이요, 중산층이다. 이미 노무현 정부가 집값에 발목 잡혀 식물화하는 것도 지켜봤다. 집값을 잡지 않고는 서민도 중산층도 없다는 사실을 정부는 잘 안다. 그런데 이 정부의 집값 해법은 공급이다. 그것도 강남 못지않은 주거 환경의 주택을 싸게 대량 공급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서울 근교의 그린벨트를 풀고 그 자리에 짓는 보금자리 주택만 한 게 없다. 예정된 30만 가구로 부족하면 더 풀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오는 이유다. 얼마나 더 풀지는 집값이 뛰는 속도와 높이에 달렸다.

이왕 풀 거라면 지금부터 체계를 세워 종합적으로 해야 한다. 여론 눈치나 보고 집값 잡기에만 급급했다간 역풍을 감당하기 어렵다. ‘누군 풀어주고 누군 안 풀어주느냐’는 형평의 문제부터 환경 파괴 논란까지 거세질 게 뻔하다. 보존은 어디까지 하고 개발은 얼마나 할지, 아파트나 공공건물 외에 어떤 걸 지을지 등의 큰 그림이 있어야 한다. 방법도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정부가 밀어붙이기보다는 공론화를 거치는 게 좋다. 1999년 DJ 정부는 2020년까지 1577㎢(전체의 29.2%)의 그린벨트를 풀기로 했다. 이후 김대중·노무현 두 정부를 지나면서 1458㎢의 그린벨트가 풀렸다. 2020년까지 풀기로 한 총량의 90%가 넘는다. 그러나 그간 변변한 공론화 한 번 없었다. 그러는 사이 투기로 땅값이 뛰고 훼손이 심해지면서 갈등과 부작용만 커졌다.

마침 이명박 대통령은 이번 휴가를 앞두고 『넛지』란 책을 청와대 직원과 출입기자들에게 돌렸다고 한다. 넛지(Nudge)는 ‘타인의 선택을 유도하는 부드러운 개입’을 뜻한다. 남자 소변기에 파리 그림을 하나 그려 넣는 것만으로 변기 밖으로 새어나가는 소변량을 80%나 줄일 수 있었던 암스테르담 공항이 좋은 예다. 대통령이 이 책에서 좋은 매뉴얼을 찾아냈길 바란다.

이정재 중앙SUNDAY 경제에디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