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추석 무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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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김남주(1946~ ) '추석 무렵' 전문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의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게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 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엉덩리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잇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이 땅의 반체제 민주화를 꿈꾸었던 김남주의 시다. 엄숙주의의 언어와 피의 언어로 점철된 그의 작품 속에서 이런 여유와 해학도 있었나 하고 새삼 묻게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제 2연 '아빠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쉬하지' 라는 네살 된 아이의 화법과 천진함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는 초승달과 결부되어 시적 정서를 만끽하게 한다.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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