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OK] 그의 칼럼을 읽고 클린턴이 서울에 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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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어느 언론인의 고백
톰 플레이트 지음
김혜영 옮김
에버리치 홀딩스
425쪽, 2만원.

제목만 보고 언론 관련 전문 서적이라고 생각했다면 오해다. 물론 저자는 30여년 동안 미국과 영국의 언론계를 주물렀던 유력 신문 기자다. 한데 그는 책에다 전문 지식을 풀어내는 대신 자신의 직업과 씨름했던 인생담을 털어놨다. 그러니 당신이 혹 언론인이 아니라고 해서 이 책을 그냥 지나칠 까닭은 없다. 그저 직업 정신이 투철했던 한 미국인의 성공기라 생각하고 가볍게 읽어도 좋겠다.

저자는 다소 생뚱맞은 문구로 책을 연다. ‘난쟁이를 넘겨라.’ 무슨 뜻일까. 한 신문사 부장이 절도범으로 잡힌 난쟁이의 실제 크기 사진을 신문 각 면에 걸쳐 싣기로 했다. 하지만 이 도발적 발상은 모두의 반대로 묻혔고, 대신 작은 얼굴이 실린 평범한 기사가 나갔다. 이 부장은 저자에게 “무덤 속에서도 후회할 일”이라고 털어놨다고 한다. 이 일화는 저자에게 귀한 참고서가 됐다. 그는 취재를 하면서 마주친 수많은 ‘난쟁이’와 씨름을 했다. 자신이 쓴 칼럼으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의 아시아 순방 일정을 바꿔버린 것도 그 중 하나다. 1990년대 중반 저자는 아시아 순방 중 한국 방문 일정을 빠뜨린 클린턴에게 경고를 했다. 북한에 “한미 관계가 소원해졌다”는 잘못된 신호를 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칼럼은 대통령의 책상 위에 놓였고, 실제로 클린턴은 일정을 바꿔 한국을 찾았다. 무수히 부딪히는 ‘난쟁이’를 넘기지 못하면 특종도 영향력 있는 기사도 쓸 수 없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저자는 ‘LA 타임즈’, ‘타임’ 등 유력지에서 주로 아시아 관련 칼럼을 썼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은 물론 고이즈미 일본 총리 등 아시아 지도자들과의 단독 인터뷰를 따낸 일화가 흥미진진하다. 양주가 담긴 카트가 편집국을 돌아다니는 ‘타임’의 음주문화 등 언론계의 숨겨진 이야기도 읽을 거리다.

저자는 책 중간중간에 작은 활자로 일종의 격언을 적어뒀다. 당신이 언론인이 아니라면 그저 훌륭한 잠언으로 읽히겠지만, 언론인이라면 가슴 한 켠이 서늘할 테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말. ‘당신에겐 경쟁적 본능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만일 후자라면 언론계는 꿈도 꾸지 마라.’

정강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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