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로, 학자로…'천주교의 증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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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최석우 신부가 구한 말 조선교구장을 지낸 뮈텔 주교의 일기 사본을 들고 있다.한국 천주교회사 연구에 일생을 바쳐온 최석우 신부가 구한 말 조선교구장을 지낸 뮈텔 주교의 일기 사본을 들고 있다.

월간 '교회와 역사' 8월호에는 한국교회사연구소 40주년을 기념하는 김수환 추기경의 글이 실려 있다. 추기경은 "역사는 인생의 스승이요, 시대의 증인이며, 진리의 빛"이라는 고대 로마의 웅변가 키케로의 말을 인용하며 지난 40년간 연구소를 이끌어온 최석우(82)신부를 축하했다.

국사편찬위원회 이만열 위원장도 "연구소가 없었다면 한국교회는 급격한 사회변동으로 많은 자료를 유실했을 것이며, 21세기 교회에도 자양분을 제공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1975년 창간된 '교회와 역사'는 지금까지 351호가 나왔다. 역사전문지가 30년간 빠짐없이 발간된 건 유례가 드물다.

교회사연구소가 17일 설립 40돌을 맞는다. 1964년 서울 가톨릭신학대 부속기관으로 출발했던 이 연구소는 현재 천주교의 연구역량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성장했다. 불모지였던 한국교회사를 개척해온 최 신부(현재 연구소 명예소장)를 찾은 지난 3일, 그는 열심히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었다. 또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팔순의 나이가 믿기지 않았다.

"다음달 열릴 40주년 기념 심포지엄에서 발표할 논문을 정리하고 있어요. 남들은 수고했다고 축하하지만 한 100년은 흐른 것 같습니다. 그만큼 우여곡절이 많았거든요."

최 신부는 61년 독일 본대학에서 '조선에서의 첫 대목구 설정과 가톨릭교의 기원'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사편찬위 자료연구협의회 위원.민족문화대백과사전 편집위원 등 '신부'보다 '학자'의 길을 걸어왔지만 그것 또한 '하느님의 소명'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우리 사회에는 한 우물을 파는 사람이 부족합니다. 지금이 어떤 시대입니까. 전문가의 시대잖아요. 과거에 대한 연구 없이는 국가의 발전도 기약할 수 없습니다. 요즘 세상을 보세요. 정치든, 경제든 철학이 없어요. 원칙 대신 임기응변이 앞섭니다."

연구소는 그간 많은 성과를 거뒀다. 천주교 관련 사료를 발굴하고, 교구.본당 자료집을 내고, 교회사 관련 단행본.잡지를 출간했다. 85년 나온 '한국가톨릭대사전'은 대표적 저작으로 꼽힌다. 한국 천주교 역사를 5000여 항목으로 훑었다. '가톨릭대사전'은 전15권으로 확대 편집, 현재 10권까지 발간됐다.

'뮈텔 주교 일기'도 소중한 자료다. 1890~1932년 조선교구장으로 근무했던 프랑스 신부 뮈텔이 남긴 일기를 번역했다. 한국 근대사의 주요 사건을 상세하게 기록한 이 일기는 1920년 부분까지 책으로 묶였으며, 프랑스어에 능통한 최 신부가 일일이 감수 중이다.

"평등의식 고취, 민주화 항쟁 등 천주교는 한국 사회에 많은 공헌을 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제도보다 정신운동을 전개해야 합니다. 정신의 변화 없이는 제도개혁도 없거든요. 요즘 교회는 성장에만 열중하는 것 같아요. 종교도 외화내빈에 빠진 것이죠." '시대의 증인'을 자임해온 노신부의 일갈이 매서웠다.

글.사진=박정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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