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 현정은 방북 맞춰 유씨 풀어 줘…상응하는 ‘선물’ 기대한 듯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03면

뉴스분석  북한이 13일 개성공단 근로자 유성진씨를 전격적으로 풀어준 것은 무엇보다 대남 압박의 지렛대로 삼으려던 전략이 빗나가 억류 사태가 오히려 큰 부담으로 작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당초 북한의 의도는 북한 체제 비판 등의 혐의를 유씨에게 씌워 남한 정부를 압박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유씨를 ‘조사 중’이란 이유로 장기 억류하면서도 기소를 못하며 어정쩡해 하는 기색이었다는 게 정부 당국자의 전언이다.

지난 4일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면서 국면이 북한에 더욱 불리해진 것도 핵심 요인으로 작용했다. 김 위원장이 유화 제스처를 쓰며 미국과의 직접 대화를 요청하는 상황에서 클린턴이 유씨 송환을 거론한 때문이다. 남한 내에서도 미국 여기자는 풀어주고 동족인 현대아산 근로자는 계속 억류하느냐는 비판이 제기됐다. 북한이 주장한 ‘우리 민족끼리’가 결국 허구라는 아픈 지적이었다. 결국 여기자를 동반해 귀환한 ‘클린턴 방북 효과’가 유씨 석방 과정 전반에 작용한 모양새다.

서재진 통일연구원장은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로 수세에 몰린 것도 유씨를 석방한 한 배경”이라며 “한·미의 대북 공조와 압박이 주효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김정일 위원장의 ‘아량 있는 조치’로 상황을 미화하려는 속내도 엿보인다. 김영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김 위원장의 소위 ‘통 큰 선물’을 과시하려는 움직임”이라며 “클린턴 접견으로 대내외 정치 목적을 100% 달성한 김 위원장으로서는 유씨 문제에 얽매일 필요가 없을 것”이라고 풀이했다. 다만 체제와 관련된 문제를 내세워 유씨를 억류해 온 북한 군부나 공안기관이 이번 조치에 대해 불만을 가질 소지가 없는지는 향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전문가들은 유씨 석방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김정일 위원장의 만남이 이뤄지기 전 실행된 점에도 주목한다. 당초 현 회장의 요청을 받은 김 위원장이 송환을 명령하면 귀경길에 현 회장이 유씨 신병을 인도하는 이벤트가 예견됐었다. 서재진 원장은 “과거 같으면 대북 지원 등 ‘몸값’ 지불을 요구하면서 막판까지 버텼을 북한이 이번에는 먼저 풀어줄 테니 상응하는 조치를 취해 달라는 메시지를 우리 정부에 보낸 것이 크게 달라진 점”이라고 분석했다.

김영수 교수는 “유씨를 선제적으로 풀어줌으로써 남북 관계가 꼬인 게 이명박 정부의 ‘대북 압박’ 때문이며 이에 대한 비판 여론이 고조되기를 겨냥한 측면도 있을 것”이라고 진단했다. 유씨 귀환 직후 천해성 통일부 대변인이 “석방 대가는 없었다”고 선을 그은 건 불필요한 논란을 차단하고 정부의 대북 원칙에 흔들림이 없음을 강조하려는 뜻으로 보인다.

8·15를 넘기지 않고 유씨를 풀어주려 북한이 애쓴 흔적도 드러난다. 17일부터는 을지훈련이 예정돼 북한이 유화 조치를 취하기 쉽지 않다. 정부 당국자는 "13일 개성에 간 조건식 사장이 북측에 ‘8·15 경축사가 준비 중인데 유씨 석방이 조속히 이뤄져야 긍정적 결과가 나올 것’임을 설득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김영수 교수는 “이명박 대통령이 경축사에서 열린 자세를 보여달라는 북측의 뜻도 담겨있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이영종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