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위 낮추는 한국]경제찬물 우려 간첩선에 곤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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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정부가 대북 (對北) 포용정책의 유지에 지나치게 집착한 나머지 북한 지하시설의 실체 해석 및 대처에 미온적이 아니냐는 비판이 거세게 일고 있다.

더욱이 동해에선 금강산 관광선이 올라가는데 서해 앞바다에서는 간첩선이 내려오는 혼란스런 상황이 겹치면서 우리측의 '무른 대응' 에 대한 의구심은 더욱 점증하는 양상이다.

지난 96년 쌀을 받은 북한이 잠수정 침투로 되갚았던 국면이 악순환 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마저 나오고 있다.

특히 강화도 앞바다에 침투한 간첩선의 경우 우리 함정은 접근조차 불가능한 수심 1m 안팎의 얕은 해역을 유유히 도망친 특수 제작선으로, 보기에 따라선 '동해 잠수정, 서해 간첩선' 구도를 낳게 할 주목할 사건이기도 하다.

정부는 그러나 이같은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가급적 수위를 낮추는 모습이다.

김대중 대통령은 이날 귀국회견에서 " (지하시설의 핵 관련) 증거도 없는데 지나치게 악화시키면 경제회생에 손상을 준다" 는 입장을 고수했다.

간첩선 침투에 대해서도 보고를 못받았다고 전제한 뒤 "잠수정 침투.미사일 발사 같은 사건들은 남북관계에서는 불가피하게 일어나는 일로 너무 예민해선 안된다" 는 견해를 밝혔다.

외교.안보분야 장관들도 20일 국회 답변에서 "포용정책은 유지돼야 한다" 는 모범답안을 되풀이했지만 내부 입장정리엔 곤혹스런 모습이 역력하다.

우리측이 이처럼 수위조절에 골몰하는 데는 金대통령도 언급했듯 경제회생 노력에 찬물을 끼얹을지 모른다는 고려가 우선 깔려 있다.

지난 94년 북핵 파동 당시 북한의 "천배 백배 보복" "서울 불바다" 발언의 악몽이 재현될 경우 힘들여 유치한 외국투자가 썰물처럼 빠질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다.

섣부른 강경대응으로 어렵게 성사된 금강산 관광 등 남북경협이 전면 중단될 경우 우리측이 쓸 수 있는 대북카드가 없어져 '미.북간' 해결구도가 고착될 가능성도 당국자들이 우려하는 대목. 한국이 배제되는 이 단계에 이르면 김영삼 (金泳三) 정부 당시처럼 대북제재의 강 (强).온 (穩) 을 둘러싼 한.미간 갈등이 진짜 표면화할 우려가 있다는 얘기다.

미국측이 압박수위를 높이는 데는 국내정치적인 배경이 있다.

미 하원은 내년 6월까지 지하시설 의혹 해소, 미사일개발 저지를 전제로 대북 중유예산을 승인했다.

시간이 촉박한 미국으로선 대북 압박 강도를 높일 수밖에 없는 셈. 카트먼 특사의 '충분한 증거' 발언도 국무부와 사전협의를 거친 의도적 언급으로 우리측은 보고 있다.

정부의 신중론은 그러나 가중되는 세간의 우려와 미국의 압박 고조 속에서 힘겨운 씨름을 해야 할 것 같다.

최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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