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방송법'석달 미룬다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6면

'통합방송법' 은 무슨 만병통치약 같았다.

줄줄이 부도난 케이블 TV, '돈 먹는 하마' 소리를 듣는 무궁화위성, 방송의 독립성 침해, 시청자 주권의 위축…. 골치아픈 얘기들이 나올 때마다 당국은 통합방송법에 길이 있다고 했다.

이 법의 놀라운 '약효' 는 이번 국정감사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됐다.

정부의 실정 (失政) 을 신랄히 따져야 하는 의원들도 "곧 마련될 새 법을 통해 해결하겠다" 는 답변 앞에선 별 말을 할 수 없었다.

한데, 국감이 끝난 지 일주일도 안돼 느닷없이 그 만병통치약의 시판을 늦춘다는 여당의 발표가 나왔다.

여기가 결리고 저기가 쑤시는 증세에 시달리면서도 '신비의 묘약' 만 기다리던 방송계에겐 충격이었다.

여당의 방송법 상정 유보 발표가 있던 16일 저녁 서울 시내의 한 음식점에선 각 방송사.유관단체 노조 대표들이 마련한 기자간담회가 열렸다.

원래 통합방송법 내용에 대한 견해를 발표하는 자리였으나 상황이 급변하자 여당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노조대표들의 생각은 대충 하나였다.

정권이 막상 만병통치약을 내놓으려다 보니, 이놈이 '치료되지 않았으면…' 하는 병까지 낫게 할까 하는 염려가 생겼다는 것이다.

바로 '독립성 상실증' 이다.

정부의 홍보성 프로를 만들라는 지시에 치를 떨었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많은 방송 종사자들에겐 이번 조치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다.

여당은 3개월, 딱 3개월만 미루는 것이라고 했다.

보다 나은 법안 마련을 위해서. 그렇다면 올 상반기 방송법이 제정될 것이란 장담을 해놓고 한해가 저물도록 뭘 하다 이제와서 3개월을 요구하는지 묻고 싶다.

따지고 보면 방송계에 닥친 재난들은 대부분 정치권이 방송법을 놓고 말씨름해 온 지난 3년간 빚어졌다.

앞으로도 얼마나 많은 고통을 겪어야 방송법을 보게 될까. 방송노조들은 일제히 총파업 준비에 들어갔고, KBS 현관엔 파업 찬반투표를 알리는 공고가 붙었다.

과연 이 시대에 모든 채널이 재방송 프로로 메워지는 진풍경을 봐야 하는가.

강주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