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방귀를 뀌었으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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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강도와 절도의 차이는 무엇인가.

타인의 재물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해 불법으로 가져가는 점에서는 강도나 절도 모두 다를 바가 없다.

그러나 강도는 피해자를 항거불능 (抗拒不能) 의 상태로 몰아놓고 재물을 빼앗아 가는 점이 절도와 다르다.

그점, 바로 피해자의 항거불능상태 유무가 강도와 절도의 차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국세청장과 국세청차장이 서울시내 호텔에 별도 캠프까지 차려놓고 직접 기업인들을 하나씩 불러 돈을 내라 했다.

그 자리에서 거절할 수 있는 기업인은 1997년의 이 나라에서는 있을 수가 없었다.

바로 항거불능의 상태였다.

국세청의 모금행위를 강도에 비교하는 사람이 있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모은 돈이 한나라당에 흘러 들어갔고, 대선자금으로 쓰였다.

애당초 대선자금 용도로 돈을 모은 사실도 드러났다.

이게 바로 지금까지 밝혀진 이른바 세풍 (稅風) 사건의 줄거리다.

희한한 것은 그게 처음부터의 골격이었는데도, 민초 (民草) 들 가운데는 지난주 야당총재의 사과발표를 듣고서야 세풍사건을 거짓말 아닌 확실한 참말로 믿은 사람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사안인데다 처음부터 부인하는 목소리가 너무 컸기 때문이다.

결코 국세청을 통한 모금사실이 없다고 했다.

세풍.총풍 (銃風) 모두 여당의 '이회창 죽이기' 라 했다.

조사가 진행중이므로 속단할 수는 없으나 한나라당의 모금사실 부인은 참말일 수 있다.

한나라당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도 국세청 스스로 알아서 모금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이 국세청을 통해 모금한 사실이 없다' 는 외침은 '국세청이 모금해 전달한 돈을 한나라당이 대선자금으로 썼다' 는 사실까지 가려지게 한 측면이 있다.

세풍사건이 처음 불거지자 이회창 총재는 바로 돈을 받았다는 사람을 보란 듯이 당의 요직에 기용했고, '특별검사의 조사' 라는 전제는 달았으나 "우리 당이 대선자금과 관련해 잘못이 있는 것으로 판명된다면 그에 대한 모든 도의적.정치적 책임을 지겠다" 는 성명까지 발표했기 때문이다.

어정쩡하기는 했지만, 그러고도 두달이 지나서야 사과를 했기 때문이다.

우리 속담에 '방귀 뀐 사람이 성낸다' 는 말이 있다.

과오가 있거나 미안해 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화를 낸다는 뜻이다.

세풍사건도 그런 꼴이 됐다.

성도 그냥 성을 낸 게 아니라 격렬하게 성을 내는 바람에 '한나라당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게 한 것이다.

거액을 횡령한 국회의원이 자기네 당사에서 이른바 단식투쟁을 벌인 것도 방귀 뀐 사람이 성을 낸 경우다.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듯이 머리에 띠까지 두르고 '정치탄압' 이라며 절규했고, 동료들은 그의 체포를 막기 위해 거듭 거듭 합심해 임시국회를 소집해줬다.

그러면서 6개월 동안이나 총리의 서리 꼬리를 붙잡고 늘어지며 금쪽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다.

방귀를 뀌었으면 미안해 하는 게 옳다.

자존심 때문에 그게 어렵다면 그냥 다소곳이 있어주는 성의는 보여야 한다.

오히려 성을 내며 판을 혼란스럽게 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엊그제 여야 총재회담이 국난 (國難) 의 공동극복을 다짐하는 자리였다면 이제부터야말로 더 이상의 소모전은 절대 없어야겠기에 하는 소리다.

그러지 않아도 잔뜩 찌푸린 얼굴로 화를 내고 있는 일부 기득권층의 '방귀 뀌고 성내기' 가 도 (度) 를 지나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요즘이다.

빚 얻어 굿을 하니 맏며느리 춤추듯, 철없이 흥청대며 나라를 이 지경 만드는데 '기여' 한 사람들 얘기다.

그들은 "5년만 참자" 느니, "1년반만 견디면 된다" 느니 하는 얘기를 거침없이 주고 받는다고 한다.

'5년' 은 현 대통령의 임기 얘기고, '1년반' 은 내각제 본격 거론에 이어 2000년 총선만 끝나면 대통령의 레임덕 현상이 온다는 뜻이라 했다.

지금은 심각한 위기상황이다.

평상시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수술받지 않으면 살아날 수 없는 환자를 앞에 놓고 대안도 없이 "환부를 도려내서는 안된다" 며 "우 - 우 - " 하는 야유를 퍼붓거나, 성을 내며 집도의 (執刀醫) 의 발목을 잡으러 덤벼서는 안된다.

그것도 환자를 여기에 이르도록 한 책임이 적지 않은 쪽에서 그런다면 도리가 아니다.

역사상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대수술이다.

과정에 에러도 나올 것이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을 못담가서는 안된다.

구더기는 들어내면 된다.

우리의 위치가 IMF체제라는 칠흑 어둠속 터널의 한 가운데라면 힘을 합쳐 터널을 벗어나는 게 최선이다.

지금은 그게 도리다.

오홍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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