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기자 칼럼]조치훈 1,000승이 주는 화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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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본인방전 10연패에 이어 또다시 1천승의 대기록을 세운 천재기사 조치훈9단에게 박수갈채가 쏟아지고 있다.

일본은 가부키.스모와 함께 바둑을 자신들의 전통문화로 서구사회에 자랑해왔다.

그 꼭대기에 조치훈이란 한국인이 반석처럼 앉아있는 모습은 감개무량하며 의미심장하다.

다만 조9단이 만42세에 달성한 1천승은 일부에서 보도된 것처럼 세계 최연소는 아니며 94년 서봉수9단의 만41세 달성이 세계 최연소임을 밝혀둔다.

한.일간의 바둑대결은 임진왜란 직후인 16세기초 조선의 고수 이표사와 일

본 초대 본인방 산샤 (算砂) 의 대결이 최초라고 알려진다.

일본측의 기록에 따른 것이지만 당시 석점을 접히고 패한 이표사는 편액과 바둑알을 선물로 보냈는데 그 편액은 지금도 교토 (京都) 적광사에 걸려있다.

일제시대에 일본은 문화정책의 일환으로 식민지인 한반도에 일본식 바둑을

보급하려고 애썼다.

그바람에 1930년대엔 조선의 노국수들이 모여 우리 고유의 순장바둑을 폐지하고 현대바둑을 둔다는 결의를 한 일도 벌어졌다.

해방무렵 청년 조남철은 그 옛날 문익점이 붓 대롱에 목화씨를 훔쳐오듯 일본의 바둑기술을 배워왔고 그로부터 한국에도 본격적으로 일본식 현대바둑이 시작됐으니 어떤 의미에서 사태는 일본이 바란대로 됐다고 볼 수 있다.

이후 김인.조훈현 등이 일본유학을 통해 국내 정상에 올랐고 서봉수는 토종이란 이유로 특별히 각광받기도 했다.

그러나 90년대에 접어들어 한국은 일본과 중국을 압도하고 세계를 제패했다.

세계는 이창호가 지배하고 일본은 조치훈이 지배해 한국 일색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조치훈9단은 각종 세계대회에 일본대표로 출전하는데 과거 같으면 난리가 났을 일인데도 요즘엔 시비하는 사람이 없다.

강자의 여유다.

순장바둑이 사라지고 현대바둑을 두고 있지만 그걸 일본바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없다.

1천5백년전 백제 의자왕이 보낸 아름다운 수정바둑알과 바둑판은 지금도 일본 황궁의 보물전시회 때의 단골 품목이다.

이처럼 바둑은 중국과 한국을 거쳐 일본으로 갔으니 본래 일본것이 아닌데 룰이야 어떤 룰이든 무슨 상관이 있을 것인가.

IMF시대인지라 바둑이 강해지면 국운이 일어난다는 중국의 옛말이 새삼 위안이 된다.

또 일본문화의 유입을 걱정하는 요즘 바둑계의 승리는 곱씹어볼 만한 가치가 있을 것이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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