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고홍주 美국무부 인권차관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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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5면

그는 끝내 정장차림으로 사진을 찍었다.

자연스런 모습을 위해 양복 윗옷을 벗고 찍자고 했더니 웃으며 대번에 손을 내저었다.

"아버님께선 항상 몸가짐을 근엄히 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

해럴드 고 (한국명 高洪柱) 교수의 작고한 부친 고광림 (高光林) 박사는 이처럼 자식들에의 엄격한 가르침을 통해 지금도 살아 있다.

80년대 초반 예일대에서 공부하던 필자가 저술활동을 돕기 위해 자주 만났던 고광림 박사는 일요일 아침에도 항상 넥타이를 단정히 맨 정장 차림으로 필자를 맞아 정확하게 한시간씩 함께 보내곤 했었다.

본인과 같은 또래 '해럴드' 가 이제 미 국무부 인권차관보가 되어 워싱턴 국무부 옆의 한 호텔 방에서 편안하게 마주앉았지만 그 역시 윗옷조차 벗지 않았다.

해럴드에게 모친 전혜성 (全惠星) 씨가 차지하는 무게 또한 각별하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일해라. 남들과 달리 생각하는 훈련을 해라. 주어진 상황이 더 나아질 수 있도록 끊임없이 노력해라" 라고 줄곧 일러주던 어머니의 교훈을 해럴드는 지금도 잊지 않고 있다고 한다.

인권차관보로 지명받고 난 후 처음 생각난 사람도 '부모님' 이고, 자신이 평생 모범으로 삼아 따르려 했던 이상적 인간형도 '부모님' 이다.

- 이제 부모님을 본받아 큰 성취를 이룬 셈 아닌가.

"내 인생에 두가지 큰 일을 해 보게 된다는 것은 진정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

그가 말하는 두가지 큰 일은 법과대학 중 세계 최고라는 예일대에서 한국인 최초로 석좌교수가 됐던 것, 자신이 줄곧 관심을 가져왔던 인권문제를 미 행정부에서 총괄하는 최고위직을 맡게 됐다는 것을 말한다.

그는 31세에 이미 예일대 교수가 돼 그간 학생들의 추천으로 법대 졸업식 연설을 두번이나 했으며, 이제 44세의 나이로 차관보가 됐다.

- 오래 전부터 인권문제에 큰 관심을 갖고 활발한 활동을 해온 것으로 아는데.

"아버님께서는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옹호를 중시하셨다.

나 역시 민주주의와 인권옹호를 전공하고 가르치며 몸으로 뛰었다.

또 미국 사회에서 60년대에는 시민권 운동, 70년대에는 환경보호 운동이 벌어졌던 것처럼 80년대에는 인권보호가 큰 운동 (movement) 으로 자리잡았다.

인권운동은 또한 서구적인 가치에 국한되지 않는 인류 보편적인 것이다. "

실제 인권 문제를 연구하며 인권침해 사례를 고발하고 대변했던 해럴드의 지난 10년은 국경을 초월한다.

아이티.과테말라.중국.쿠바 난민들의 미국내 인권옹호에 앞장섰고 관련 정부와 단체들로부터 상도 많이 받았다.

93년부터는 예일대 국제인권센터의 2대 소장으로 일해 오면서 '자신이 직접 인권운동에 참여하며 이론과 실제를 겸비해 강의할 수 있는 교수가 가장 좋은 교수' 라는 생각에 충실하려 했다고 한다.

보스니아.아이티 등의 난민정책 등과 관련해 미 의회의 자문에도 여러번 응했다.

이같은 그의 경력이 그가 인권차관보로 선임된 배경이다.

'그 밖의 배경' 에 대해 묻자 그냥 웃으며 입을 다문다.

이번 국무부 차관보직이 해럴드가 미 정부에서 일하는 첫 경험은 아니다.

83년부터 3년간 미 법무부의 법률자문관으로 일한 적이 있고 그 이전에는 미 연방고등법원의 맬컴 윌키 법관과 해리 블랙먼 미 연방대법관의 사서 (clerk) 로 있었다.

미국에서 법학을 전공한 이들이 가장 원하는 엘리트 중의 엘리트 코스를 걸

었던 셈이다.

"당시 아버님은 내가 미 대법관을 위해 일한다는 사실에 큰 자부심을 갖고 계셨다.

이민 2세대 만에 그런 자리에 오를 수 있다는 것은 큰 영광이라고 여러번 말씀하셨다.

어머니 역시 이번에 내가 이민 2세대 만에 미 행정부의 고위 외교관이 됐다고 매우 기뻐하셨다. " (미 국무부의 인권차관보는 업무 성격상 각국을 다니며 협상도 해야 하므로 외교관 신분을 동시에 갖고 있다. )

- 이민 2세대 만에 그러한 성취를 이룬다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따라서 많은 한국계 미국인들에게 당신은 '본받을 만한 인물' 로 비치고 있다.

"나뿐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큰 성취를 이뤘지만 우리는 항상 겸손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남매는 사실 이민 2세대라지만 그중 가장 오래된 세대에 속한다.

한국인들의 미국 이민이 대부분 한국전 (韓國戰) 이후에 시작됐으나 우리 부모님은 한국전 이전에 이미 미국에 오셨다.

우리는 빨리 시작한 셈이고 누구든 빨리 시작했으면 그만큼 큰 성취를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 대학을 떠나 정부로 자리를 옮긴다는 결정은 쉽게 내렸나.

"인권을 가르치며 뛰었던 내가 같은 목적을 위해 정부에서 일하자는데 어떻게 거절할 수 있었겠는가.

큰형 하워드 (한국명 경주) 도 보건학을 전공한 교수였지만 지난해 매사추세츠 주정부의 보건부 장관직을 제의받았을 때 같은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며 수락했었다. "

- 큰형만이 아니라 6남매 모두가 미국 명문대를 나와 미국 사회의 핵심에 성공적으로 진출한 이들로 잘 알려져 있다.

가정 교육에 남다른 데가 있었는가.

"모두가 열심히 했던 결과다.

우리는 부유한 가정이 아니었고, 따라서 좋은 교육을 받아 미국 사회에서 많은 기회를 누리려면 공부를 열심히 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학교 가는 것 말고도 형제들 모두 책을 많이 읽었고 아버님은 우리의 독서 기록을 꼼꼼히 챙기셨다.

하버드대가 있는 케임브리지를 떠나 예일대가 있는 뉴 헤이번으로 이사한 후에는 지하실에 책상을 여럿 놓고 교수이셨던 부모님과 우리들이 함께 앉아 공부하는 것이 생활의 자연스런 일부였다. "

그는 "능력있고 부지런하며 모든 일에 정성을 쏟는 한국인들이 미국 사회에서 성공하지 못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고도 강조한다.

한국계 미국인들에 대한 그의 생각도 '한국의 뿌리' 에 대한 강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오래전 한국에서 온 입양아들이 미국 국적을 취득하는 자리에 초청받아 연설한 적이 있다.

그 때 나는 한국계 미국인이란 입장을 양쪽 사회에 모두 불편한 존재로 생각 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강조했다.

오히려 자랑스런 두 사회의 뿌리를 이어받은 것을 특별한 축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다고 했다.

아버님께서도 한국의 뿌리를 한시도 잊지 않았던 애국자셨다. "

- 워싱턴에는 많은 친구들이 있을 텐데.

"예일대에서 교수생활을 한 덕에 워싱턴에 많은 친구와 제자들이 있다.

더욱이 내가 젊은 나이에 교수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에 나보다 나이 많은 제자들이 행정부 등 각계 요직에 많이 있다. "

사실 해럴드에게 워싱턴은 각별한 곳이다.

82년부터 2년간 워싱턴 법률회사에서 변호사로 일할 때 부인 매리 크리스티 피셔를 만나 결혼했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매리는 조지 워싱턴대 법학 교수였다.

결혼 후 우리는 예일대로 돌아가 나는 교수가 됐고 매리는 변호사로 일했다.

가르치고 돈버는 데 서로 역할분담을 했던 셈이다. "

이제 막 미 행정부의 고위직에 들어서는 해럴드에게 '장래의 자기 모습' 을 물어보자 가장 '미국적' 인 대답이 나왔다.

- 자신이 어떤 인물로 기억되기를 원하는가.

"첫째 좋은 남편, 둘째 좋은 아버지, 셋째 좋은 교수로서 기억되고 싶다.

한가지 더 원한다면 평생 남을 위해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다. "

일하는 시간 외엔 큰 딸 에밀리 (한국명 영연.12세) , 아들 윌리엄 (한국명 원림.8세) 의 숙제를 돌봐주고 윌리엄과 야구를 하거나 수영.하이킹을 즐기는 것이 취미다.

윌리엄은 박찬호 선수도 잘 알고 있다고 한다.

박세리 선수도 잘 알지만 그의 집안은 골프와는 거리가 멀다.

평생 딱 두번 골프를 쳐봤는데 그래도 그중 한번은 스코틀랜드의 명문 골프 장 세인트 앤드루스에서의 라운딩이었다고 웃는다.

"당시 휴가 중이라 한번 치게 됐는데 4시간 이상씩 걸리는 골프는 나에게 맞지 않더라" 는 것이 그의 회고다.

인터뷰 내내 윗옷도 벗지 않는 '근엄함' 을 지켰지만 해럴드는 여전히 장발 (長髮) 축에 속한다.

다만 예전의 사진에 비하면 그래도 많이 머리가 짧아졌다.

- 혹시 상원 인준 청문회 때문에 머리를 깎았는가.

"하하, 왜 그런 걸 묻는지 모르겠다. "

- 전에 비하면 머리가 좀 짧아진 것 같아서. "시간이 없어 이발소에 자주 가지 못한다.

얼마전 아들과 함께 집에서 잔디를 깎다가 아들 머리가 너무 길어 함께 간 김에 나도 깎았다. "

- 모친 全박사는 96년에 펴낸 수상록에서 항상 '재승덕 (才勝德) 하지 말 아라' 고 가르쳤다고 적고 있다.

자신의 가정에서는 무엇을 강조하는가.

"항상 앞을 보라. 지난날에 얽매이지 말고 펼쳐질 장래를 생각하라는 것이 우리 집의 모토다. "

매일 오전 4시에 일어나 자정 (子正) 전에 잠자리에 드는 생활습관마저 부친을 따다 박은 해럴드는 6남매 중 외모도 가장 부친을 닮았다.

업무 인수인계를 위해 워싱턴에 왔던 그는 앞으로도 몇번 더 뉴 헤이번과 워싱턴을 오가며 집과 아이들 학교도 알아보고 부인의 직장도 구한 뒤 내달 중순 정식으로 임명장을 받고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종일 국무부 브리핑을 받은 후 배낭 가방에 잔뜩 자료를 짊어지고도 모자라 두 손 가득 서류철을 들고 호텔 방에 들어선 장발의 해럴드는 아직까지 여전히 미국 여느 대학 캠퍼스에서 마주칠 수 있는 풋풋한 젊은 교수의 모습이었다.

만난사람=길정우 워싱턴 특파원

[약력]

▶1954.12 미 매사추세츠주 케임브리지 출생 (만 44세)

▶1975 하버드대 최우등 (summa cum laude) 졸업

▶1977 영국 옥스퍼드대 수학

▶1980 하버드대 법과대학원 우등 (cum laude) 졸업

▶1981~82 맬컴 윌키 연방고등법관 및 해리 블랙먼 대법관 사서1

▶1982~83 워싱턴소재 코빙턴 앤드 벌링 법률회사 변호사

▶1983~85 미 법무부 법률자문관

▶1985~현재 예일대 법과대학 교수

▶1993~현재 예일대 법과대학 부설 국제인권센터 소장

▶1996~97 영국 옥스퍼드대 교환교수

▶1998.5 뉴욕시립대학 명예법학박사

▶1998.9 국무부 인권차관보 지명

▶1998.10 상원 외교위 인준 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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