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파격 인사'로 술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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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장.부장.차장제 없애 … 간부 85% 감축
국장급 124명 중 79명 평팀원으로
사원 5명.차장 30명 팀장으로 발탁

KBS에서 차장.부장.국장으로 직급이 올라가면 당장 달라지는 게 있다. 책상과 의자다. 책상의 폭이 일정 규격만큼 넓어지고, 의자 뒷받침 높이가 올라간다. 국영방송으로 출발한 KBS의 관료주의적 속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런 KBS에 최근 엄청난 내부 충격이 가해졌다. 어제까지 국장이었던 간부가 평사원 역할을 하고, 평사원이 팀장이 돼 조직을 이끌게 됐다.

워낙 강도가 세서일까. KBS 전체가 술렁이고 있다. "KBS가 망하는 꼴을 못 보겠다"며 중간 간부를 중심으로 내부 모임도 결성될 예정이다. 이런 가운데 정연주 KBS 사장은 5일 기자 간담회를 열어 개혁 취지를 설명한다.

◇위.아래 뒤흔든 조직 개편=KBS가 지난달 30일과 이달 3일 발표한 인사는 기존 국.부.차장 자리를 없애고 '팀장'으로 단일화한 것이 요체. 이로써 1120명에 달했던 간부는 184명으로 85%가 줄었다. 조직은 '본부장(센터장)-팀장-팀원'으로 간소화돼 서울 본사의 경우 166개의 국.부가 감축됐다. 양이 문제가 아니라 질적인 변화가 무엇보다 큰 특징이다.

예전엔 차장.부장을 거쳐야 국장이 될 수 있었지만 이젠 평사원도 팀장을 맡을 수 있다. 서열도 장애물이 아니다. 실제로 평사원 5명과 차장급 30명이 이번에 연공서열을 뛰어넘어 팀장에 임명됐다. 반대로 국장급 124명 중 79명(64%)은 평팀원이 됐다.

예를 들어 국장급인 A씨는 인사가 발효되는 9일부터 현 관리자 시절을 잊어 버리고 일선에서 뛰며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까마득한 후배들과 시청률을 놓고 경쟁해야 한다. 임금 보전책을 마련 중이지만 당분간 지갑도 얇아질 형편. 직책수당(월 84만5000원).업무 추진비(월 80만원) 등이 줄거나 없어져 연 500만~1000만원의 수입 감소가 예상된다.

KBS 측은 "능력 위주 인사를 통해 유연하고 창의적인 업무 환경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며 "젊은 PD의 패기와 노련한 PD의 경륜이 어우러져 프로그램의 질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다. KBS는 뼈를 깎는 개혁이 선행돼야 '수신료 현실화'라는 숙원 사업을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기대''우려' 엇갈려=인사 이후 KBS는 환호와 기대, 냉소와 분노가 얽혀 어수선하다. 우선 기대. 누구도 하지 못했던 과감한 개혁을 통해 KBS가 군살을 빼고 효율성 높은 조직으로 변신하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 중간 간부는 "사장과 노조가 '코드'를 맞춰 KBS를 망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린다.

17일께엔 KBS의 최근 행보에 반기를 든 '직장협의회'도 출범한다. 이 모임을 주도하는 윤명식 심의위원은 "결국 머리와 발만 남기고 몸통은 잘라낸 셈"이라며 "가뜩이나 편향성 논란에 휩쓸리고 있는데 중간 거름 장치마저 제거했다"고 지적했다. 그는 "'다양성'이란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간 술집에서, 자판기 앞에서 터뜨려 왔던 비판을 공론화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기득권을 지키려는 것 아니냐"는 내부 반론도 제기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제작 파트에선 벌써 신경전이 감지된다. 방영할 수 있는 프로그램 수량은 제한된 상황에서, 젊은 PD들이 위에서 뚝 떨어진 간부 PD들을 '왕따'놓으려는 조짐도 있다. KBS의 전례없는 '개혁'실험이 앞으로 어떻게 진행될지 주목된다.

이상복.구희령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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