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북·미 대타협' 대비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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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동해안에 금강산 관광선과 미 항공모함이 함께 뜨는 상황이 벌어지지 말란 법 있나. "

최근 워싱턴을 방문했던 한 학계 원로는 대북정책 관련 인사들을 두루 만나본 후 서울과 워싱턴의 거리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소떼가 판문점을 건너고 머지않아 유람선도 떠나게 될 모양이지만 워싱턴내 북한 논의 분위기는 한마디로 험악하다.

핵 의혹 지하시설이나 미사일 발사실험처럼 미국 신경을 건드리는 북한에 계속 끌려갈 수는 없다는 것이 분위기의 골자다.

북.미 기본합의의 주역인 로버트 갈루치도 대북 합의 사수 (死守)에는 역부족이다.

그는 "미 국방정보국으로부터 북의 지하시설 관련 브리핑을 듣고나니 지하시설에 대한 사찰이 의미없다는 말을 도저히 할 수 없더라" 며 문제의 심각성을 인정했다.

과장된 정보니, 설익은 정보니 하며 신중한 자세로 일관해온 우리 정부의 표면상 입장과 미 정보당국의 판단에는 거리감이 있다는 말이다.

와중에 미국의 대북 강경책이 결국 한국의 대북 포용정책을 돕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는 주장도 들린다.

그러나 대북관계에서 미국이 악역 (惡役) 을 맡아줘야 남북 대화의 여지가 생긴다는 그럴듯한 역할분담론이 현실로 다가올 것 같지는 않다.

지난주 4자회담에서도 확인했듯 미국에 매달리는 북한과 북한 달래기에 급급한 미국이 택할 수 있는 현실적 대안은 결국 '그랜드 바겐 (대타협)' 일 가능성이 크다.

미 의회내 강경 목소리를 대변하는 이들의 입장도 결국 이 길로 모아진다는 것은 차라리 역설 (逆說) 이다.

타협안에 어떤 내용이 담길지가 문제이긴 하지만 빌 클린턴이 곧 임명할 고위 조정관 역할이 우리 정부의 생각처럼 제한적일 것이라고 기대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워싱턴 분위기의 종착지를 미리 간파하고 우리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대안을 찾아 미측의 논의과정에 입력시키는 노력이 절실해졌다.

길정우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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