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화재배세계바둑오픈 관전기]6.고바야시 통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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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8강전. 이창호9단은 패배의 늪에 빠져 이미 목까지 잠긴 상태였다.

그러나 전주 현지의 팬들은 그런 위기를 전혀 믿으려들지 않았다.

그바람에 프로기사들조차 '도저히 회생불능' 이란 표현을 보류한채 이창호의 신통력에 한가닥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런 믿음 탓일까. 고바야시 사토루 (小林覺) 9단은 자꾸 결정타를 놓치고 있었고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이창호의 뒤만 따라다녔다. 흐름은 기이하게 변하더니 기어이 고바야시의 헛수가 등장했다.

4, 5집 끝내기가 사방에 널려있는데 그는 태연히 후수 1집내기를 했고 그것으로 바둑은 역전되고 말았다.

승부는 이창호의 1집반승. TV해설을 끝낸 조훈현9단이 내려오더니 "창호는 운도 좋아. " 하며 웃었다.

이창호는 누구보다도 정성스럽게 바둑을 둔다.

그 지극 정성이 귀신마저 움직인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고바야시는 결승선 10미터 전방에서 운동화 끈을 고쳐매는 이상한 행동 끝에 패배를 자초했고 이날 그는 술에 대취한채 스스로의 부족함을 한탄해야했다.

9일 아침 9시30분 전주시 코아호텔. 8강전의 나머지 두판인 조치훈9단대 류샤오광 (劉小光) 9단, 이성재5단대 유시훈7단의 대국이 속개됐다.

'개미귀신' 이란 별명을 지닌 류샤오광은 깊은 수읽기로 함정을 파고 있다가 상대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보내버린다.

조치훈은 폭파전문가.

이 두사람이 맞붙자 바둑은 처음부터 격렬하게 얽혀들었다.

조9단이 류샤오광의 대마를 포위하자 류샤오광이 흑의 포위망을 거꾸로 역습하여 오히려 조9단이 위기를 맞게됐다.

머리를 박박 밀어버린 류샤오광의 집념은 피를 토하는듯 했다.

그러나 이날의 변수는 초읽기였다.

바둑이 너무 복잡해서 두사람은 중반전투에 이미 1분초읽기에 돌입했는데 류샤오광은 당황하여 좋은 기회를 연속 놓친 반면 언제나 100수 언저리에서 초읽기에 몰리곤 하던 조치훈은 숙련된 교관처럼 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이성재5단쪽은 오후 4시무렵 일찌감치 승부가 나버렸다.

프로는 패싸움이 벌어져도 단 한집의 손해패조차 쓰지 않는게 원칙이다.

이5단은 그러나 중반전에서 근 20집을 먼저 손해보는 엄청난 대모험을 결행했고 결국은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불계패하고 말았다.

이리하여 4강이 결정됐고 다시 대진추첨이 벌어졌다.

일본대표는 조치훈과 유시훈 2명. 같은 국가의 대표끼리는 피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본 두사람을 앞에 두고 한국의 이창호와 중국의 마샤오춘 (馬曉春) 이 추첨을 했다.

4강이나 8강 언저리에서 추첨만 하면 이창호를 만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곤 했던 마샤오춘, 그가 이번엔 자동적으로 이창호를 피하게 됐다.

대형 교통사고에서도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마샤오춘에게 정말 대운이 터진 것일까.

이9단이 먼저 추첨을 했는데 상대는 조치훈이었다.

유시훈의 상대는 자연 마샤오춘이 됐다.

여기 저기서 아쉬움 석인 탄식소리가 터져나왔다.

이창호와 조치훈 두 강자의 대결이 결승5번기가 아닌 준결승 단판으로 끝나게 된데 대한 아쉬움의 소리였다.

박치문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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