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가 있는 아침]김혜순 '죽은 줄도 모르고' 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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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 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 김혜순 (金惠順.43) '죽은 줄도 모르고' 중

삶의 일상은 이렇듯이 참담하게 죽어있는 상태인가.

죽은 줄도 모르고 침대에서 일어나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아침 식당의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에 구두를 신고 묘지나 다름없는 거리로 나오는 한 사내의 무자각적인 반복의 출근과 퇴근에서 시인은 카프카적인 사망선고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런 악마주의가 도리어 인간 회복을 호소하는 역설인가.

고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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