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신숙주·사명당 그리고 DJ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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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한.일 관계사에 대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견해는 대담하다.

金대통령은 "1천5백년 교류사에서 사이가 나빴던 때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豊臣秀吉) 때 7년, 메이지 (明治) 유신후 40년 등 50년 정도다.

이 기간 때문에 1천5백년의 좋은 관계가 손상되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라고 강조한다.

한.일관계에서 임진왜란과 일제의 한국지배를 먼저 떠올리는 일반적 시각과는 다르다.

두번의 한국 침략을 뺀 나머지 기간은 교류협력의 역사라는 파격적인 인식이다.

金대통령은 그런 생각을 최근 서울 주재 일본 특파원들과 만나 얘기했으며, 7일 일본에 가서 진정한 화해시대를 열겠다고 작정하고 있다.

일왕 (日王) 을 일본인의 호칭인 천황으로 부르자는 것도 그런 맥락에서다.

80년대 이래 과거사와 관련한 일본인들의 망언이 터져나와 긴장이 고조될 때마다 金대통령은 두가지 자세를 취했다.

하나는 일제의 식민통치에 대한 일본 상층부의 어이없는 미화와 트집을 꾸짖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엄격한 자성 (自省) 이다.

金대통령은 "조선 멸망은 어떻게 보면 자멸이었으며, 임금과 집권층을 잘못 만난 인재 (人災) 다.

통치자의 무능은 죄악" 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사 문제는 양국 정상의 방문과 정권교체 때마다 등장하는 외교의 '통과의례' 다.

金대통령의 방일이 일본측의 망언과 사과의 악순환을 끊는 계기가 될지는 미지수다.

그만큼 양국 관계를 에워싼 환경들은 복잡 미묘하며, 지난 5년간 양국 관계는 더욱 경직.악화됐다.

일본 지도층 내부의 '황국 (皇國) 일본' 에 대한 향수와 집착은 끈질기며, 한국을 싫어하는 혐한 (嫌韓) 감정은 커졌다.

우리사회 일각에서도 일본의 경제력과 문화를 평가하면서도 겉으로는 '일본은 없다' 고 하는 식의 이중성이 두드러졌다.

지난 정권때는 과거사 문제가 터질 때마다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이 "문민정부는 다르다.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고치겠다" 고 별렀지만, 그러기는커녕 외환위기가 닥치자 도와달라고 고개를 숙여야 했다.

YS는 당시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가 '아니키' (兄貴.형님) 라고 부르는데 기분 좋아했다.

그러나 하시모토는 결정적 순간에 외면했고, 한국은 국제통화기금 (IMF) 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검찰에 낸 YS의 환란 (換亂) 답변서는 "최대 채권국 일본이 만기연장을 안해주고 외채를 회수함으로써 사태악화를 촉발했다" 고 실토했다.

문민을 앞세우면 외교 난제도 풀릴 것이라는 착각과 오만의 뼈아픈 결과다.

김대중 시대의 한.일관계에서 우리는 일본을 보는 이중성과 위선에서 벗어나야 한다.

일제침략을 어떻게든 미화하려는 일본을 단호하게 질타하되 일본내에서 한국을 이해하는 층을 두텁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서로간에 지일 (知日).지한 (知韓) 파가 많아져야 한다.

양국의 오랜 관계를 돌이켜보면 소신껏 이해의 공간을 넓히려는 인물들이 있었다.

조선시대의 신숙주 (申叔舟) 와 사명당 (四溟堂) 을 꼽을 수 있고, 임진왜란후 성신 (誠信) 외교를 내세운 일본의 아메노모리 호슈 (雨森芳洲) , 그리고 가나야마 마사히데 (金山政英) 전 주한대사가 그런 범주에 속한다.

사명대사는 임진왜란때 왜적을 물리치기 위해 살생을 말라는 부처의 계율마저 뛰어넘었지만 종전후 일본을 방문해 도쿠가와 이에야스 (德川家康) 와 담판, 양국관계 재정립에 나섰다.

나라를 편안케 하려면 우리 옆에 엄연히 존재하는 일본을 무시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조선 초기 정치가 신숙주의 방일 견문록인 '해동제국기 (海東諸國記)' 는 대일외교 지침서였다.

그의 '전략적 화평론' 을 지금의 미묘한 한반도 정세에 적용하면 남북통일을 위해서라도 일본과 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아메노모리는 대 (對) 조선 외교에서 성의와 신의를 앞세워 적대감을 씻는데 기여했다.

그 3백년 뒤, "저 세상에 가서도 양국을 위해 일하고 싶다" 며 자신의 유해 절반을 한국에 묻어달라는 가나야마의 유언은 양국민에게 진정한 선린 (善隣) 이 될 것을 촉구하는 '시위' 라고 할 만하다.

이들의 고뇌와 집념.경험은 21세기를 향한 양국관계에서 소중히 기억되고 참조돼야 한다.

그것은 진실된 지한.지일파를 확충하기 위한 작업의 하나다.

金대통령의 방일은 그 출발점이 돼야 한다.

박보균(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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