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노숙자 '합동 차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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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추석이 설날.정월대보름과 함께 우리 민족의 3대 명절 가운데 하나임에는 틀림없지만 본래 서울지역에서는 추석 명절을 요즘처럼 요란하고 거창하게 쇠지 않았다.

한식 (寒食) 날처럼 그저 집에서 차례나 지내고 성묘를 다녀오는 것이 고작이었다.서울에서도 추석을 '명절답게' 쇠도록 고취한 사람은 어린이 운동의 선구자 방정환 (方定煥) 이었다고 한다.

서울 토박이인 한 원로 문필가의 회고에 따르면 방정환은 1924년과 그 이듬해의 추석날 두차례에 걸쳐 천도교회 (天道敎會) 윗마당에 가설무대를 만들고 동요.동화 대회를 열어 '추석 명절' 을 고취했다는 것이다.

대회가 끝나면 참가한 모든 어린이에게 송편 다섯개씩 든 봉투를 나눠주어 인기가 대단했다고 한다.

그이후로 추석날만 되면 서울사람들도 명절 기분에 젖어 공연히 들뜨곤 했지만 일제 (日帝) 의 수탈이 갈수록 심해지니 명절을 쇠는 것도 그저 마음 뿐이었다.

그래도 서울사람들에게 추석이 은근히 기다려지는 것은 그때나 이때나 시골 인심이 서울 인심보다 후해 가까운 시골에 찾아가면 밥과 술과 고기를 배불리 얻어먹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에 유학와 있던 시골 학생들도 시골집에서 인편이나 우편으로 보내 온 인절미나 송편 따위로 명절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으니 일제 치하에 있어서의 '추석 경기' 는 순전히 시골에 의해 좌우됐던 셈이다.

그러나해방 이후 모든 것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지면서 추석 등 명절의 분위기도 서울에서 시작되는 '민족의 대이동' 으로 절정을 보이기에 이르렀다.

그래서 서울사람들의 추석 형편이 좋아야 시골사람들의 형편도 덩달아 좋아지게 돼 있다.

오히려 '서울이 기침하면 시골은 감기가 들' 정도다.

한데 IMF인지 뭔지 해서 지난 한햇동안 서울의 경제가 밑바닥을 맴돌고 있으니 시골의 추석 분위기는 더 말해 무엇하랴. 서울도 실업자가 넘쳐나는 판인데, 생계가 막연한 수많은 시골 사람들이 일거리를 찾아 꾸역꾸역 서울로 올라와 노숙하고 있다.

당장 절박한 이들에게 추석이니 차례니 안중에 있을 리 없다.

서울시와 종교.사회복지단체들이 귀향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추석날 아침 합동차례상을 차려주기로 했다 한다.

남이 차려준 차례상 앞에서 조상 뵐 면목이 없는 지방 출신 노숙자들의 슬픔을 어찌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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