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철새 정치인은 사기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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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철새 정치인들이 줄을 잇고 있다.

새 정권이 들어선 후 야당의원들이 줄줄이 여당으로 향하더니 새로 뽑힌 지방자치 단체장.의회 의원들은 한술 더 뜬다.

취임 이틀 만에 탈당하는 시장이 있는가 하면 한 지역의 시장.군수가 4~5명씩 떼지어 당을 옮겼다.

또 어느 지역은 시의원 수십명이 무더기로 탈당하기도 했으니 참으로 꼴불견들이다.

국회의원만 보더라도 15대국회 들어 개인적인 이유로 당적을 옮긴 의원이 56명이라 한다.

지역구 출신 4.5명중 1명꼴로 당을 바꾼 셈이다.

야당.무소속의원의 여당입당이 45명으로 대부분이었고 새 정부 출범후 야당에서 여당으로 옮긴 경우만도 23명이었다.

6.4 지방선거후 몇달 사이 자치단체장.의원들의 당적변경은 헤아리기조차 힘들 정도다.

이들은 하나같이 그럴 듯한 명분을 내세우지만 유권자 입장에서 보면 이들의 당적변경 행위는 배신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지역대결 구도로 후보자 면면보다 정당을 보고 선택하는 경우가 많았다면 더욱 그렇다.

지역에 따라서는 인물에 관계없이 정당공천이 바로 당락을 좌우하고, 특히 지방자치 선거에서는 입후보자를 거의 모른 채 정당에 의존하는 경우가 훨씬 많은 게 우리의 정치현실이 아닌가.

중앙일보 창간 여론조사를 보면 야당의원의 여권합류에 대해 65.5%가 '바람직하지 않다' 고 답했다.

또 70.5%는 야당의원의 여권입당과 정치권 사정 (司正) 이 '관련있다' 고 보고 있다.

정계개편의 필요성을 인정 (49.1%) 하면서도 이같은 당적변경에는 3분의2가 부정적인 셈이니 당적변경에 대한 국민들의 반감이 어느 정도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때문인지 법조계 주변에서는 농반진반 (弄半眞半) 으로 선출직 공직자의 탈당을 형법 제347조 (사기) '사람을 기망 (欺罔) 하여 재산상의 이득을 취득한 자' 로 보고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선거과정에서 정당공천을 강조한 것은 기망행위에 해당하고 당선후 받게 되는 봉급 등은 재산상의 이득으로 볼 수 있으며 배신당한 유권자가 바로 피해자라는 것이다.

물론 법 이론보다 감정적으로 그렇다는 뜻이겠지만…. 선거법상 전국구 의원은 당적을 이탈하면 의원직을 잃지만 지역구 의원은 그렇지 않다.

주민에 의해 뽑힌 것이지 정당 때문에 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는 논리다.

당적변경 금지는 참정권이나 신념의 자유를 제한하는 결과를 가져오므로 위헌 (違憲) 소지가 있다는 이론도 있다.

그러나 입으로는 공복 (公僕) 임을 자처하면서 주인인 유권자와의 약속을 어기고 도리어 분노와 실망을 주는 일은 이제 제도로 막아야 한다.

정당공천 공직자의 임기중 당적변경 금지를 법제화하자는 것이다.

특히 지역감정이 무엇보다 우선하는 우리 선거풍토에서 당적변경은 바로 배신이고 변절이다.

또 당선자 한 사람의 자유.권리보다 다수 유권자의 권리가 우선적으로 보호돼야 하는 게 사리에도 맞는다.

사회정의 측면에서는 배신이나 변절이 반윤리적이고 비도덕적이라는 가치관도 지켜져야 한다.

또 당적변경을 금지하면 정계개편의 정지작업을 위해 검찰이 편파.표적사정한다는 지적도 사라질 것이다.

정치인의 당적변경 문제는 여러 차례 거론됐지만 그때마다 흐지부지된 우리만의 후진국병이다.

여당인 국민회의나 자민련 모두 야당시절 직접 피해를 보고 가슴앓이를 했던 문제가 아닌가.

무엇보다 그 폐해와 부당함을 체험으로 알고 있는 현여권 지도부가 이를 바로잡기는커녕 오히려 활용하고 있는 형국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긴급 기업대출.비리 무마.요직 우대 등 최근 여당으로 간 의원들의 사연을 보면 위급할 때 정치인들에게 당적이 얼마나 요긴하게 쓰이는지 잘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정치인들에게는 여야를 막론하고 당적변경을 금지할 하등의 이유도, 뜻도 없다고 봐야 한다.

그들에게 스스로의 발목을 묶도록 법을 고치라고 기대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주문인 것이다.

정치인에게는 명분이나 법리 (法理) 차원이 아닌 실속.실리의 문제다.

결국 유권자들은 인물 됨됨이보다 탈당 가능성부터 점쳐보고 뽑아야 뒤늦게 열 올리거나 참정권을 송두리째 도둑맞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것 같다.

새삼 정치인들의 이기심과 욕심이 문제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

권일(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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