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공황은 오는가]下.전문가 대담-한국경제가 사는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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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국내경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밖에서는 세계공황이라는 절망적 시나리오까지 나돌고 있다.

만일 세계공황이 눈앞의 현실로 닥친다면 한국경제의 장래는 어찌 될 것인가.

세계공황의 가능성을 점검하고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는 한국 나름의 생존전략을 전문가 대담을 통해 정리해 본다.

▶사회 = 최근 세계 경제공황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정말 대공황이 닥칠 가능성이 있나.

▶이경태 = 최근의 경제위기가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대공황으로까지 악화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미국의 크루그먼 교수는 "대공황이 발생하려면 모든 좋지 않은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야 한다" 고 했다.

이를테면 미국.유럽의 주가 동반폭락, 러시아의 환율폭등, 아시아.중남미의 경제위기 악화, 독일.미국 등 선진국의 정책협조 실종 등이 동시에 벌어지면 대공황으로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날 가능성은 극히 작다.

더구나 1929년의 대공황때에 비해 현재 세계 각국 지도자 및 경제담당자들은 지혜와 경험을 더 풍부히 갖고 있다.

따라서 세계경제가 공황에 이르도록 방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 = 그러나 세계경제의 상호연관성이 깊어지면서 위기의 전파속도도 유례없이 빨라졌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어느 한 지역에서 경제위기라는 전염병이 돌면 곧바로 세계로 퍼져 나갈 수도 있다.

아직 전염병에 걸리지는 않았다지만 선진국들은 동남아 등 현재 전염병을 앓고 있는 지역에 투자해 놓은 것이 많다.

일각에서 연쇄부도에 의한 대공황을 우려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한구 = 아시아 위기 초기에 느긋하게 지켜보기만 하던 미국의 태도에 최근 변화가 일고 있다.

이제는 미국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는 얘기다.

미국은 금리인하 등 세계경제의 파국을 막는 유력한 수단을 갖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의 스캔들로 미국의 정치적 리더십이 위기를 맞고 있어 다른 나라 문제에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미국 등 선진국의 대응속도에 비해 경제위기의 전염속도가 훨씬 빠를 수밖에 없다.

선진국의 대응이 늦어지면 자칫 국수주의적인 금융.환율 경쟁이 세계 각국에서 일어나 세계 대공황의 우려도 그만큼 커질 수 있다.

그러나 이같은 가정에도 불구하고 세계 각국간에 경제위기 확산을 막기 위한 공감대가 충분히 형성돼 있어 대공황의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본다.

▶사회 = 다음달에 서방선진7개국 (G7) 회담이 예정돼 있는 등 선진국들도 한달전에 비해 아시아.러시아발 (發) 세계 경제위기에 대해 더 진지한 자세로 접근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정책협조를 통해 금리를 공동인하한다든가 국제통화기금 (IMF) 이 국제투기자금의 규제방안을 마련중이라는 소식도 들린다.

그같은 협의가 실제로 이뤄질 것인가, 또 이같은 처방으로 현재의 세계 경제위기를 치유할 수 있는가.

▶정진영 = 과거 경험으로 보면 각국의 이해관계가 달라 G7회담을 통해 금리인하 등의 결정이 당장 이뤄지기는 어렵다.

그러나 IMF가 추진중인 국제 투기성자금 규제 등은 곧 이뤄질 가능성이 크다.

국제금융계의 대부격인 조지 소로스마저 핫머니 규제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핫머니의 폐해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됐다는 얘기다.

IMF를 중심으로 한 핫머니 규제가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세계 경제위기는 상당부분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것이다.

▶이한구 = IMF가 국제 투기자본을 규제한다 해도 새 시스템을 만들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

또 새 시스템이 과연 세계 각국의 이해관계를 충분히 충족시킬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게다가 핫머니 규제만으로는 세계 경제위기의 근본적 해결이 어렵다.

▶정진영 = 소로스는 채권국에도 책임을 지우자고 주장했다.

IMF 역시 채권금융기관 책임론을 거론하고 있다.

돈을 빌려 간 나라가 부도날 경우 빌려준 금융기관도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미국의 금융기관이 한국의 부실기업.금융기관에 빌려줬는데 부도났다면 이를 공동책임 지는 식의 접근방식인데 이는 현재 국제 금융위기의 해결방법이 될 수 있다.

또 세계 주요통화의 환율변동폭을 줄인다든가 하는 방법도 유용한 수단이 될 수 있다.

IMF가 중심이 돼 달러.유로.엔 등에 대한 환율안정장치를 만들면 실효성도 클 것이다.

▶사회 = 한국경제가 더 나빠질 것이라는 전망이 속속 나오고 있다.

여기에 세계공황까지 닥치면 우리경제는 최악의 상황을 맞는 셈이다.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이경태 = 한국은 지금 '거친 바다에 떠 있는 한 척의 보트' 와 같다.

여기에 대공황까지 닥치면 보트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대재앙을 맞을 수도 있다.

▶사회 = 대재앙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이경태 = 사상 유례없는 대량실업.금융경색은 물론 경제시스템의 기반붕괴 등이 그것이다.

▶정진영 = 세계공황이 닥칠 우려가 적은 만큼 동아시아지역의 공황 가능성과 이에 대한 한국의 대책을 논의하는 게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한다.

▶사회 = 좋은 지적이다.

그러나 동아시아 공황이 닥치면 한국이 혼자 애쓴다고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황때면 모두 망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이한구 = 일본을 앞장세워 동아시아 전체의 수요를 끌어올리는 방법이 있을 수 있다.

일본의 재정투자나 경기부양은 동아시아 경제위기의 유력한 해법이다.

일본 국내의 경기부양이 여건상 어렵다면 한국 등 동남아시아의 젊은 경제에 자본을 투입해 경기부양을 꾀하도록 유도하는 것도 한 방책이다.

▶사회 = 일본의 책임감 있는 노력을 촉구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이한구 = 한국정부가 정부차원에서 일본에 전아시아권의 수요진작책을 건의하면 어떤가.

또 물물교환식의 무역을 제의하거나 과잉공급 부문에 대한 공동 감산을 제의할 수도 있다.

▶사회 = 동아시아 전체 차원의 구조조정을 하자는 뜻인가.

▶이한구 = 그렇다.

게다가 아시아가 극한 위기로 치닫게 되면 미국.유럽도 더이상 팔짱만 끼고 있기는 어렵다.

전염을 막기 위해 뭔가 대책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이경태 = 실제 준공황상태가 되면 세계 각국의 정책이 자국 이기적으로 흐를 가능성이 크다.

말로는 공조를 외치지만 혼자만이라도 살아남자는 식의 경쟁이 이뤄지면 정말 곤란한 상황이 올수도 있다.

▶이한구 = 동아시아 공황이 일어나면 각국이 서로 과잉공급을 줄이는 등 해결책 마련에 나서게 되고 선진국도 어차피 못받을 부채를 탕감해주는 식으로 문제를 풀어갈 수밖에 없다.

문제는 이때 정치적 위험이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국보호.국수주의적 경향이 짙어지고 시장경제에 대한 회의가 전사회에 확산될 것이다.

또 책임추궁론이 고개를 들면서 정치상황이 극도로 혼란해질 수 있다.

▶정진영 = 동아시아 각국은 남미 등에 비해 협력체제가 너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다.

한국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여타 아시아국가와의 차별화를 강조하고 있다.

이는 말레이시아나 중국.대만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자기만 살아남겠다는 논리는 선진국의 호응을 얻기 어렵다.

동아시아 전체를 묶어 정치세력화하는 등의 해법을 찾아야 한다.

그러려면 한국보다는 일본이 앞장서야 한다.

일본이 국내 소비를 늘리고 저축을 줄여 주변국의 수출증가와 경기부양을 도와줘야 한다.

이는 곧 일본이 동아시아 경제의 주도국으로서 충분한 책임과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위해 우선 일본의 저축률을 10%대로 낮춰야 한다.

▶이경태 = 아시아 전체의 공조체제 구축은 쉽지않다.

아시아국가들의 입장과 생각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경제위기에 대한 아시아 각국의 대응만 봐도 이는 쉽게 알 수 있다.

말레이시아는 독자노선을 택한 반면 한국은 IMF처방을 따르고 있다.

일본은 아시아통화기금을 만들자고 했다가 미국이 반발하자 철회했다.

▶이한구 = 동아시아는 10년 넘게 수출경쟁을 벌이느라 각개약진 경향이 강했다.

그러나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은 아직도 막강하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된다.

아시아 위기에 대해 서유럽.미국이 수수방관한다면 일본과 긴밀한 협력체계를 갖추는 것만이 한국의 유일한 대응책이 될 것이다.

▶사회 = 우리 경제의 불황이 계속되고 대외여건이 악화되면서 환란과 공황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최소 7백억달러 이상 보유해야 한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나오고 있다.

그러나 외환보유액을 늘리려면 이자 등 비용부담이 만만치 않아 반대의견도 많다.

▶이한구 = 불황과 외환보유액 확충은 다른 문제다.

수출증대로 달러가 많이 들어오면 외환보유액을 늘리는 건 당연하다.

그러나 남의 빚을 얻어 억지로 외환보유만 늘리는 건 반대다.

그럴 돈이 있으면 지금은 외채부터 갚는 데 써야 한다.

▶이경태 = 우리 경제는 내년이 올해보다 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세계경제의 불안도 여전할 것이고 IMF의 지원능력도 한계에 왔다.

또 외채상환 등 외환수요도 내년부터 크게 늘어날 것이다.

반면 외평채금리 폭등 등으로 달러를 마련할 길은 막힌 상태다.

따라서 빚을 내서라도 외환보유액을 가능한 한 많이 확충해야 한다.

▶이한구 = 그랬다간 나중에 갚을 때 더 많은 비용과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외채.외환보유액.경기를 따로 떼놓고 봐선 안된다.

외채를 줄이면서 외환보유를 늘리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

▶사회 = 세계 불황이든 아시아의 공황이든 외부에서 아무리 거센 파도가 몰아쳐도 한국 경제가 이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이한구 = 실물부문, 즉 산업조직이 우선 튼튼해져야 한다.

또 국제자본의 급속한 이동에 견딜 수 있도록 금융체질을 강화해야 한다.

대외관계도 크게 개선해야 한다.

위기때 즉각 지원이 가능하도록 미국.유럽과의 유대를 긴밀히 하고 범아시아 블록을 만드는 등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이경태 = 지난해 외환위기때 이를 극복하자는 국민적 공감대가 있었다.

그때 하고자 했던 금융.기업 구조조정 등을 지속적으로 해나가는 게 중요하다.

▶정진영 = 국제협력체제를 갖추는 게 무엇보다 시급하다.

한국.중국.일본을 잇는 해저터널.대륙횡단철도 등 동북아 인프라 확충도 좋은 방법이다.

이는 경기부양 효과도 있어 동아시아 위기 극복에도 도움이 된다.

정리 = 이정재 기자

<참석자>

이한구 대우경제연구소 소장

이경태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원장

정진영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김정수 본사 전문위원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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