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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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승희의 좌판으로 가보았을 때, 태호의 말처럼 가관이었다.

과일상자 위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변씨의 모습은 비 맞은 수탉 그대로였다.

먼저 철규를 발견하고 얼른 외면하는 그를 잡아채서 호젓한 뒷골목으로 찾아들었다.

"팔이 부러진 것입니까?" "팔이 아니고 손가락인데 뼈가 부러지지는 않았다는구만. " "어떤 놈과 다퉜습니까?" "본색을 모르지만, 완력깨나 쓰는 놈이 틀림없는데, 이 고장 토박이는 아닌 것 같더군. " "시비가 붙은 것입니까, 무조건 두들겨맞은 것입니까. "

"대낮에 다방에 앉아 바지를 까내리고 레지와 맷돌치기로 재미 보고 있던 연놈을 대선배의 입장으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나. 눈물이 쑥 빠지도록 혼찌검을 내겠다고 몇 마디 거들다가 이런 낭패를 보았어. 오늘 하루 운세가 사나웠던 모양이야. "

"그런다고 고스란히 얻어맞고만 있었어요? 형님 근력도 이젠 쇠퇴한 모양이군요. " "근력만 쇠한 게 아니야. 이젠 눈까지 멀어서 대낮에 도깨비까지 보인다니까. 마늘장 구경을 한답시고 어슬렁거리고 있는데, 눈앞에 난데없는 윤종갑이가 나타나는 거야. 근력은 쇠했다 하더라도 눈썰미까지 의심한 적은 없었는데, 이젠 도깨비까지 보이기 시작하니 나도 이젠 뒷방으로 들어앉아야 할 신세라는 것을 깨달았어. 그놈이 내 손목을 꺾는데도 가만두고 있었던 것도 난데없이 나타났던 그 도깨비 때문이었어. "

"그 도깨비는 나도 보았습니다. "

"자네 같은 나이에 도깨비가 보인다면 어불성설이지. 날 안심시키려 할 필요 없네. " "마침 이쪽 골목으로 돌아오는데 마늘짐을 두 손에 든 윤종갑이가 나타나길래 나도 이게 어인 도깨비인가 하고 걷다 말고 혼자 서서 웃었습니다. "

"자네가 윤종갑을 봤단 게여?" "도깨비인지 실물인지 알 수 없지만, 그 위인을 본 건 틀림없어요. " "그럼 헛것이 보였다는 게 아니지 않나?" 그 순간 변씨의 시선은 가파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찾고 있는 공중전화 부스는 보이지 않았다.

철규는 절뚝거리는 변씨를 곁부축하여 한길로 나섰다.

주문진 윤종갑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다.

그 아내의 퉁명스런 대답으로 부재중인 것은 확인할 수 있었으나 행방은 모른다고 잡아떼었다.

서둘러 영동식당으로 전화를 걸었다.

묵호댁 역시 대꾸가 시큰둥했는데, 봉환의 행방에 대해선 전혀 아는 게 없었다.그들 두 사람이 작당하여 주문진을 떠났다는 내막을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는 변씨로선 막막하고 난감했다.

봉환에겐 다시 전화를 걸어보기로 하고 수화기를 놓았다.

무슨 조화가 있었기에 찾고자 하는 두 사람 모두가 부재중이며 행방조차 알 수 없는 것일까. 그러나 윤종갑이가 주문진에 없다는 것은 확실해졌지만, 설마 낯선 고장인 의성장터에 나타났을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러나 그를 발견한 것은 한 사람도 아닌 두 사람이었다.

근력이 소진되어 눈에 헛것까지 보였다는 창피를 돌이켜놓기 위해서도 윤종갑을 찾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변씨는 만류하는 철규를 꾸짖어 좌판으로 돌려보낸 다음 절뚝거리며 장거리를 발서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계절로는 벌써 초가을로 접어든 시기여서 북적거리던 장꾼들은 어느새 썰물처럼 장터를 빠져나가고, 값싼 저녁 찬거리를 사러 나온 아낙네들 몇 사람이 팔다 남은 채소전을 찾아 기웃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좌판을 거두어 떠날 준비를 서두르는 노점들도 여럿이었다.

두 시간 이상이나 서캐 잡듯 장바닥을 훑었으나 윤종갑은커녕 그와 모색이 닮은 사람도 찾지 못하고 말았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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