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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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흥정이 마무리될 동안 남편은 전혀 상관이 없는 사람처럼 먼발치에 뚝 떨어져서 딴청을 피고 있었다.

부부 사이라는 것을 전혀 내색하지 않는다.

상인과의 흥정이 자신들이 예정했던 가격으로 원만하게 결단이 나면, 남편은 처음처럼 시치미를 뚝 잡아떼고 떠나게 되지만, 흥정이 실망스러운 결과로 치닫거나, 상인이 아낙네를 몰상식하게 상대할 위험이 있으면, 드디어 아내를 밀치고 흥정일선으로 나선다.

그리고 서툰 아내를 마구잡이로 나무라면서 거친 동작으로 물건을 거두어 잽싸게 그 자리를 뜨고 말았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더라도 아내를 흥정꾼으로 내세우는 구도는 흐트러지는 법이 없었다.

그런 흥정방법은 강원도에선 볼 수 없었던 희귀한 풍경이었다.

아내를 장바닥에 내세워서 영악한 상인들과 흥정을 하게 하면서도 정작 나서야 할 입장인 남편능 뒷전에 숨어서 흥정을 지켜보는 태도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해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그러나 그런 흥정방법은 거의 전통적인 것인지 멀찌감치 비켜서 있던 남편이 불쑥 끼어들어도 상인들은 응당 그렇겠거니 해서 트집을 잡거나 놀라지도 않았다.

그런 흥정꾼들을 살펴보다가 변씨의 눈에 무언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졌다.

헛것이 보였던 것일까. 문득 시선에 스쳐간 사람이 윤종갑인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윤종갑의 얼굴이 의성 마늘장에 나타날 리는 만무했다.

그런데 북새통을 이루는 장꾼들 사이에서 그의 얼굴이 스쳐간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와 닮은 사람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뇌리에 박힌 것은 닮은 사람이 아니라, 바로 윤종갑 당사자가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변씨는 한동안 환영을 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이가 늙바탕에 이르니까 이젠 눈에 별 것이 다 보이게 되는구나 싶어서 서글퍼지기도 했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환영 아닌 실제의 윤종갑을 보았다는 확신이 들곤 하였다.

잠시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변씨는 그 사람이 사라졌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겨 놓았다.

옷전, 어물전, 신발전, 건어물전, 과일전, 공구전, 채소전을 바쁜 걸음으로 지났지만, 윤종갑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는 채소전 한켠에 있는 빈 좌판에 털썩 주저앉았다.

문득 달아나버린 아내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내가 떠나가버린 동안 형식이와 같이 자취생활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취했던 섭생이 부실했던 탓일까. 대낮의 장바닥에 도깨비가 나타난 것도 아닐 테고 눈에 헛것이 보이다니. 낙산해수욕장에서 만났던 해변마담에게 퇴짜를 맞은 것이 충격이 컸었던가.

자신은 항용 당하는 일이어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는데,가슴 속에는 모처럼 회한으로 남아 눈에 헛것까지 보이게 된 것일까. 별의별 생각이 다 뇌리를 스쳐갔다.

그는 좌판으로 돌아가지 않고 근처의 다방으로 찾아들었다.

커피 한잔을 마셔야 정신이 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장날이어서 다방은 붐빌 것 같았는데, 불까지 꺼진 다방은 곰이라도 나타날 것처럼 음습하고 어두웠다.

휑뎅그렁하게 비어 있던 다방에서 그러나 벗었는지 입었는지 도대체 판단이 안 서는 레지가 사십대 사내의 무릎 위에 물 묻은 손바닥에 깨 엉키듯 사내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앉아 있다가 소스라쳐 발딱 몸을 일으켰다.

구태여 수상한 시선으로 보려 하지도 않았는데, 레지가 일어선 사내의 바지 앞에 달아둔 자크가 반쯤 열려 있었다.

오늘은 왜 이렇게 보지 않아도 좋을 것만 자꾸 시선에 들어오는 것일까. 그들이 저지르고 있었던 추잡스런 광경 때문이 아니라, 변씨는 문득 자신의 처지에 모멸감이 들었다.

털썩 의자에 엉덩이를 내려 놓는데, 다방 안의 전등을 다시 켠 레지가 물컵을 들고 탁자로 다가섰다.

열아홉일까, 스무살일까. 뭘 드시겠느냐는 질문에 대답은 않고 변씨는 앳된 모습의 여자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변씨의 침묵에서 저지르고 있던 일에 무안을 느낀 레지가 돌아설 만도 한데, 전혀 그렇지가 않았다.

그녀는 맨발을 샌들에 끼웠다 빼냈다 하면서 변씨의 대꾸를 기다리고 있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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