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유학을 떠나는 청년들에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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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호 35면

다음 달 즈음이면 또 많은 한국 젊은이들이 큰 뜻과 희망을 가지고 유학 길에 오를 것이다. 해마다 늘어나는 유학 행렬은 이제 미국이나 중국·일본뿐 아니라 세계 각국으로 확산되고 있다.

언론이 보도한 통계에 따르면 지난해 말 미국 내 한국 국적의 유학생 수는 12만7000명, 전체 외국인 학생의 15% 수준에 이른다. 국가별 순위로 보면 단연 선두다. 중국에서도 5만7500명으로 1위이고, 일본에서는 중국 유학생 다음으로 많은 2만7113명의 한국 젊은이들이 저마다의 꿈을 키우고 있다.

내가 오래 살았던 이탈리아의 경우에도 성악을 공부하는 한국 학생들이 이 분야에서 가장 큰 외국인 그룹을 형성하고 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도 상당수의 한국 학생들이 수학 중이다.

많은 유학생은 대부분 귀중한 시간과 학비, 노력을 쏟아부어 학위를 취득하거나 전문 지식과 훈련을 받고 국내외의 좋은 직장을 찾는다. 이들은 세계화 시대에 한국의 중요한 인재 풀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웬일인지 많은 해외 유학 경험자들이 전공과목 외에는 유학한 나라의 문화나 가치관, 생활방식 같은 것들을 충분히 소화하지 못하고 돌아오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돌이켜 보면 나 역시 ‘이런 것을 더 배웠더라면’ 하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하지만 세상이 빨라지고 세분화된 탓인지 지금은 극히 제한된 부분만 배우고 돌아오는 유학생들이 훨씬 많아지는 것 같다. 말하자면 다문화시대를 사는 지혜를 배우고 훈련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것이다.

평소에도 이를 참 애석한 일이라 느껴왔는데 마침 지난주에 친구인 미국 교수로부터 비슷한 내용의 e-메일을 받았다. 맨해튼 음대 기악과장으로 있는 데이비드 기버 교수다. 그는 한국을 포함해 동아시아에서 유학 온 학생들은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자기 공부만 한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공부 욕심이 너무 강한 탓인지,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예술은 모르고 지내지요. 그러다 보니 뉴욕이라는 도시가 제공하는 예술적문화적 풍요는 맛보지도 못하고 사는 거예요. 사실 그러한 것들이 학교 수업의 연장인데…. 학생들이 바깥세상을 모르는 게 하도 답답해 수업 전에 그날의 뉴욕 타임스 톱 기사를 큰 소리로 읽게 한 후 레슨을 시작하는데 이제는 학생들의 반응이 괜찮아요.”

이런 메일을 받은 후 다른 몇몇 미국 교수들에게 의견을 구했더니 놀랍게도 하나같이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뉴욕 줄리아드음대 성악과에 있는 로버트 화이트 교수는 “한국 학생들의 열성과 집념은 경이롭다. 그러나 서양음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음악이 나온 세계와 뿌리를 찾고 즐기려는 노력을 더 해야 한다. 미국에 왔으면 미국식으로 살아봐야 더 넓은 세상도 보이고 한국적 가치도 재발견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조언했다.

보스턴 뉴잉글랜드음대 로런스 레서 교수 역시 “언어 문제 등의 한계를 이해하지만 한국 학생들이 자기들만의 게토(ghetto)를 형성하고 그 안에서만 사는 것이 안타깝다. 유학 올 때부터 학위 취득, 콩쿠르 수상 등 너무 많은 과제를 가져오다 보니 그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막상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광범위하게 친구를 사귀며 미국 사회와 문화를 경험하려는 여유는 없는 것 같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지난주엔 한국을 잘 아는 주한 미 대사관의 외교관과 저녁식사를 하게 됐다. 그 역시 “미국 박사 학위를 가진 많은 한국인이 미국에서 몇 년씩 생활하다 온 것을 감안하면 영어도, 미국에 대한 지식도 많이 뒤진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의 유학 시절을 회고해 보면, 가장 많이 경험하고 배운 때는 3년간 미국인 가정에서 살며 유일한 한국인으로서 미국 학생들과 공부하던 로스앤젤레스 체류 시절이었다. 그 사회의 일원으로 섞여 살면서 그들의 생활습관을 접하고 우리와 다른 문화를 즐기고 이해하게 되면서 학업 못지않은 큰 것들을 얻었다. 우리보다 훨씬 더 적은 규제를 하면서도 자연스레 질서가 유지되는 그들의 절제된 자유, 자유롭게 이견을 내면서도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거나 다투지 않는 토론 문화에 큰 인상을 받았던 것 같다. 물론 외국 것이라고 다 옳고 배울 만한 것은 아닐 테지만 옳고 그름도 접하고 경험해야 제대로 구분할 수 있지 않겠는가? 세계 각지에서 학업과 경력을 쌓고 있는 수많은 우리의 젊은이가 진정한 세계인으로 성장하고 돌아오기를 바라는 애정 어린 염려가 기우(杞憂)에 그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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