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출판] 'Inventing the Axis of Evil'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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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venting the Axis of Evil
(악의 축 꾸며내기)
브루스 커밍스 외
The New Press, 213쪽, 22.95달러

말이나 용어의 함축성은 지대하다. 내포된 뜻이 응축된 것일수록 역사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 생활 및 사고 방식이 중세에서 근대로 변하는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한 ‘르네상스’란 말이 그런 예다. ‘악의 축’이라는 용어도 유일 초강국 미국으로 하여금 새로운 전쟁을 유발케 했다는 점에서 앞으로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될 것 같다.

이 말은 2002년 1월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연두교서에서 처음 사용했다. 북한·이라크·이란 정권이 제거돼야 할 대상이라며 이런 말을 썼다. 원고에 이 말을 처음 집어넣은 사람은 당시 백악관 연설문 담당자였던 데이비드 프럼이다. 그는 부시 대통령으로부터 적확한 용어를 ‘창안’해 냈다고 칭찬받았을 지 모르나 미국 출판계의 산증인이자 뉴프레스출판사를 세운 안드레이 쉬프린은 이 용어가 깊은 생각없이 ‘꾸며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프럼의 회고록을 읽고 악의 축이라는 말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탄생하게 됐는지 알게 됐으며, 이것이 책을 기획하게 된 동기라고 했다. 두달 전 나온 이 책은 당초 악의 축 3국 중 미국의 공격으로 ‘악이 제거된’이라크 대신 시리아를 포함했다. 부시 행정부가 이라크 다음으로 눈엣가시로 보는 나라이기 때문이다.

쉬프린은 브루스 커밍스 시카고대 석좌교수를 비롯, 세 나라에 가장 정통하다는 전문가 세 명에게 원고를 부탁해 이 책을 펴냈다.‘북한·이란·시리아에 관한 진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미국과 3국 간의 관계가 일그러진 데는 미국 측의 책임도 적지 않다는 시각을 담고 있다.

저자들은 3국이 과거 미국과 어떤 관계 속에서 오늘날 이렇게 자리매김하게 됐는지를 설명한다. 자연히 역사적 사건을 들추고 복잡한 국제정치 및 지정학적 해석이 동원된다. 북한을 가장 오래 연구한 학자 중 하나인 커밍스 교수는 1931년 만주사변과 그 즈음 항일운동을 벌이던 김일성의 등장에서부터 미국과 북한의 관계를 짚어 나간다. 이후 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망하고 한반도에 친일문제 등에 반대 시각을 가진 두개의 정권이 탄생하고, 한국전쟁 후 미국에 의해 고립될 수밖에 없었던 북한 정권에 대한 이해가 책의 밑바닥에 깔려 있다.

커밍스 교수는 기본적으로 북한의 핵문제가 다름 아닌 미국의 핵위협에서 기인됐다고 보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이 북한과 평화협정 체결을 통한 전쟁종식을 꾀하지 않자 북한이 생존차원에서 추구한 게 핵이라는 것이다. 미국이 이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하다가 소련의 붕괴와 91년 걸프전의 승리로 주적이 사라지자 갑자기 끄집어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커밍스는 60년이나 된 북한 정권에 대한 미국의 반목의 역사 가운데 가장 큰 돌파구로 지미 카터 대통령이 성사시킨 1994년 북·미 간 핵 타결책을 꼽는다. 북한에 경수로를 지어주는 대신 핵을 포기토록 하는 이 해결책을 현 부시 행정부가 다시 원점으로 돌리고 대북한 고립정책으로 돌아간 점을 저자는 비판한다. 위기로 치닫던 북핵 문제가 중국의 중재로 6자 회담이라는 새로운 대화 채널을 낳은 것에 대해 그는 큰 기대를 건다. 커밍스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70년대 초 닉슨 대통령이 대중국 외교에서 채택한 ‘고립 없는 봉쇄정책’이 필요하다고 강조해왔다.

이란 편은 뉴욕시립대 버룩 칼리지의 어밴드 아브라하미안 교수가 집필했다. 그는 오늘날 미국과 이란의 관계를 1953년 미 중앙정보국(CIA) 작품인 ‘이란정권 전복’에서부터 고찰한다. 양국의 본격적인 관계 악화는 79년 이란혁명이었다. 그 전까지 미국을 대신해 중동의 경찰 역할을 자처했던 이란이 인근 지역으로 투쟁적인 이슬람 원리주의를 수출하는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뉴욕=심상복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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