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S 자연다큐 앵글담기 한창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0면

올 한해 도회지 삶에 지친 사람들이 많이들 농촌으로 돌아갔다.

일제시대 저항시인 이상화는 가르마 같은 논길을 거닐며 "빼앗긴 들에도 봄이 오는 것" 을 상심과 희망으로 노래했지만, 오늘 우리는 할퀴어진 땅에서도 한알 한알 여물어가는 곡식을 안도의 마음으로 바라본다.

선선한 바람이 찾아오며 이제 논은 서서히 분주함에 젖어든다.

조금씩 속이 차오르는 벼, 그것을 향해 몰려오는 참새떼, 이를 막으려 허수아비를 세우고 총포를 꺼내는 사람들. 어찌보면 작지 않은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동안 논에 대한 우리의 관심은 온통 쌀이었다.

하지만 삼국시대 이후 어언 2천년을 견뎌온 이 '인공습지' 는 독특한 생태의 고리 안에 많은 생명체를 품어왔다.

EBS의 카메듀서 (카메라맨과 프로듀서의 합성어로 두 역할을 모두 수행하는 사람) 인 이의호 (41) 씨가 올초부터 담고 있는 영상은 바로 논의 생명이다.

식량의 공급지로서가 아니라 생물들의 삶이 영위되는 터전으로서의 논이다.

이씨가 꼭 확인하길 바랐던 것은 "뜸북 뜸북 논에서 운다" 는 뜸부기. 전국에 제보를 요청했지만 뜸부기 우는 논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러던 지난달 전남 구례에서 기별이 왔다.

단숨에 달려간 그는 논가에 만들어진 둥우리와 갈색 뜸부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지난 7월엔 충북 음성의 논 한가운데 만들어진 '쇠물닭' 집에서 알이 부화해 어미와 새끼들이 인근 야산으로 이사하는 것을 지켜보기도 했다.

올봄 처음 논에 카메라를 댔을 땐 수많은 생명체가 잉태하고 있었다.

개구리.두꺼비 알이 자라고, 이를 잡아 먹는 잠자리 애벌레.게아재비가 꿈틀대며, 미꾸라지들이 모습을 보이기 시작한다.

모내기 직전의 논은 온통 생명체로 가득하다.

그러나 모내기를 위해 땅을 갈아 엎으며 생태계는 한차례의 '학살' 을 겪는다.

여기서 살아남은 개체들이 번식을 하고 종을 일궈 여름이 되면 다시 원앙새가 놀고 갖은 수서생물들이 논을 채운다.

반딧불이의 화려한 군무가 시작되는 것도 여름이다.

그리고 가을의 전쟁. 겨울 논은 철새를 불러 모은다.

추수하며 떨군 낟알들은 오리의 먹이가 되고 또 이들을 찾아 독수리.매가 날아온다.

이렇듯 논에서 이뤄지는 삶의 순환은 풍부하면서도 경이롭다.

이씨가 담은 논의 새로운 모습은 내년 초쯤 TV를 통해 볼 수 있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제라도 누런 들판에 한번 나서보면 어떨까. 앞만 보고 각박하게 달리는 동안은 보이지 않았던 생명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으리라.

강주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