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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냉전 구도와 동북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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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냉전종식 후 15년, 유럽은 25개국의 거대 연합체를 형성해 통합과 협력의 길을 가고 있다. 아프가니스탄과 발칸, 이라크 사태로 세계가 온통 전쟁의 참화에 허덕이는 듯하지만, 큰 틀에서 보면 유럽은 냉전 붕괴 후의 자양분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위상과 영향력을 확대해가고 있는 것이다.

반면 동북아는 어떤가. 현재 이 지역은 중국의 부상에 따른 미.중의 반목과 라이벌 의식, 중.일 간의 갈등에다, 북한 핵 문제로 인해 냉전기의 중.소동맹과 미.일동맹이 겉모습만 바꾼 채 대립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물론 최근 들어선 이런 구도에도 약간씩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특히 지난 7월은 이런 변화를 상징하는 사건들이 한반도에서 집중적으로 나타났다. 먼저 지난 3일과 4일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했고 21일엔 한.일 정상회담이 있었다. 5월 22일엔 평양에서 북.일 2차 정상회담이 있었다. 2000년 이후 매년 계속되고 있는 세차례에 걸친 북.러 정상회담의 기억이 또렷한 가운데 한.러 정상회담도 9월에 열린다. 여기다 중국은 이미 6자회담과 북.중, 한.중 정상 및 외무장관 회담 등을 통해 자신들의 개입의 정도를 높이고 있다.

이렇게 보면 미국을 제외한 한반도 주변 3강이 모두 한국 및 북한과 정상회담을 포함한 최고위급 레벨의 대화를 활발히 진행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는 남북한 동시 수교국이란 이점을 살려 최근의 흐름에서 주도권을 잡고 있다. 반면 미국은 과거와 같은 우월적 지위를 서서히 놓치고 있다.

현재 미국은 이 지역에서 북한 핵 문제라는 '경성 이슈'를 제외하고는 새로운 분위기와 기류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밀려나고 있다. 오히려 북핵 문제 처리를 지연시키고 있다는 의심의 눈총을 받기도 한다.

반면 러시아는 지난 10여년 동안의 혼란에서 벗어나 중국과 미국이 분할.선점했던 동북아 및 한반도 문제에 에너지와 철도를 활용한 지정학 전략으로 대처하기 시작했다. 일본도 비록 어정쩡하지만 한편으론 미.일동맹 축의 강화를, 다른 한쪽으론 중.러.북한과의 관계확대를 통해 새로운 기회를 노리고 있다. 6자회담 틀의 정례화와 상설화 과정은 혼란에 빠진 러시아와 경제침체에 빠진 일본을 제쳐둔 채 동북아에서 중국과 미국이 합심해 그들만의 그림을 그리려 했던 4자 틀의 구도를 완전히 깨뜨린 성과를 보여준다.

이 시기 한국의 대응책은 무엇인가. 노무현 정부는 '동북아 시대'라는 담론을 꺼내들었다. 북방정책과 햇볕정책의 성과를 바탕으로, 북한을 아우르는 동북아 지역 공통의 평화와 번영의 컨셉트를 만들자는 것이다. 한국이 양자관계의 틀을 뛰어넘는 국제적 정책목표를 세우고 이를 추진하는 것은 분명 성장한 국력의 반영이자, 한국인의 세계인식의 확장의 결과다.

문제는 이 속에 담을 콘텐트를 한국의 힘만으로는 다 채울 수 없다는 것이다. 주변국의 동의와 참여를 우리의 이니셔티브로 촉진할 능력이 있어야 한다. 바로 여기에 한국과 미국.일본의 전통적 남방 3각 협력의 기회가 남아 있다. 또한 영토적으로는 아니지만 기능적으로 동북아 세력인 미국의 참여도 촉진할 수 있다.

물론 미국이 '경성 이슈'에만 매달리는 한 미국은 현재 중국에 빼앗기고 있는 이 지역민들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다. 지난 50여년 동안 이 지역에서 관찰된 자유와 민주의 생명력에 대해 미국이 확신을 갖는다면 미국은 중국의 부상에 조바심을 내기보다는 전통적 맹방인 한국과 함께 변화의 기류를 맞는 동북아에서 새로운 공동체를 형성하는 '창립주주'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수행하는 것이 옳다.

김석환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