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진혁 칼럼]여야가 다 사는 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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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대선 후 8개월이나 끌고서야 겨우 정계의 교통정리가 끝나가는 것 같다.

한나라당이 이회창 (李會昌) 체제로 자리를 잡았고 국민신당은 여당 품에 안겼다.

곧이어 야당에서 다시 몇사람이 여당으로 간다니 그로써 여대 (與大)가 이뤄지면 길고 긴 '교통정리정치' 도 마침내 끝날 것이다.

여당 할 사람은 여당을 하고, 야당 할 사람은 야당을 하는 게 옳다.

여당 할 사람은 빨리 여당에 가는 게 좋다.

여대가 돼야 사정이니 청문회니 하는 소리도 좀 쑥 들어갈 것이다.

경제위기극복이란 하나의 초점에 전력을 해도 부족한 판에 그동안 정계개편이니 사정이니 하는 소리로 초점을 분산시켜 왔으니 그런 낭비도 없다.

이젠 그런 '교통정리정치' 도 끝나가고 여당은 여대 (與大) 로, 야당은 새 지도체제로 각기 새 면모와 태세를 갖추게 됐다.

그렇다면 이젠 정치다운 정치, 일하는 정치로 가야 하지 않겠는가.

필자가 보기엔 정치권엔 두가지 길이 있다.

하나는 공멸 (共滅) 의 길이요, 하나는 공생 (共生) 의 길이다.

공멸의 길은 여야대결→정국불안→경제불안 가중→국민불신 증폭→다음 총선의 대폭 강제 물갈이→정치권 밖의 제3의 인물과 세력의 등장, 이런 코스다.

반대로 공생의 길은 여야협력→정국안정→경제위기 공동대처→국민신뢰 만회→현정치권 중심의 다음 총선의 코스다.

상식과 이성에 따른다면 정치권이 공멸의 길을 택할리는 없다.

더구나 지금 같은 국난 (國難)에서 어느 쪽도 대결의 정치.이기는 정치를 추구할 형편은 아니다.

그러나 이런 뻔한 상식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여야정치는 마치 눈만 마주치면 서로 쪼아대는 병아리들처럼 대결.대립엔 익숙해도 공생.협력엔 너무나 서투르다.

언제까지 정검 (政檢) 유착으로 나가고, 언제까지 '때려잡고' '강경투쟁' 하는 정치로 갈 것인가.

여야가 정말 공생의 길을 선택할 생각이라면 먼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바탕위에서 공생을 가능케 할 구체적인 협력의 틀을 만들 필요가 있다.

가령 집권측은 국내외 주요 안보동향을 정기적으로 야당지도부에 설명해준다.

북한동향은 물론 주요국가의 움직임과 국내의 치안상황, 그에 대한 정부대응방향 등을 정기적으로 야당에 알려줌으로써 초당적 안보협력이 가능해지고 실정과 동떨어진 야당의 강경론이나 원칙론 등 불필요한 마찰을 방지할 수도 있다.

각종 경제동향에 관해서도 마찬가지로 야당과 정보공유를 한다.

각종 통계.지표.수출입상황 등을 야당도 알아야 정책협력도 할 수 있고 건전한 대안도 낼 수 있다.

그리고 주요정책이나 조치도 사전에 야당에 귀띔하고 의견을 듣는 과정을 갖는 게 좋다.

그래야 야당의 협력과 보완을 얻을 수 있다.

처칠 총리는 늘 기자들에게 먼저 애틀리 (노동당 당수)에게 말한 후에야 당신들에게 얘기할 수 있다고 했다지 않는가.

물론 야당도 할 일이 있다.

야당은 우선 집권측과 공유하는 중요정보의 비밀엄수를 약속해야 한다.

그정도의 신용은 필수적이다.

잘난 체하고 먼저 흘리거나 정략적으로 악용하는 비열한 짓을 한다면 정치할 자격조차 없다.

그리고 안보.체제문제엔 확실한 주견 (主見) 으로 집권측을 엄호할 수 있어야 한다.

대규모 시위나 불법파업이 벌어지면 정부의 실수를 노릴 게 아니라 국가적 차원에서 단호히 반대한다는 야당의 목소리가 나와야 하는 것이다.

70년대말 보수당 대처정부의 대 (對) 노조강경책에 일부 과격세력이 파업으로 보수당정권을 몰아내자고 외칠 때 캘러헌 노동당 당수는 보수당보다 앞서 "투표함에서 정권이 나왔듯이 퇴진도 투표함을 통해야 한다" 고 과격세력을 비판했다고 한다.

야당이 귀담아 들어야 할 얘기다.

무엇보다 지금같은 위기에 처해 야당은 경제위기극복과 관련된 법안은 국회에서 신속하게 처리해줄 줄 알아야 한다.

그걸 질질 끌거나 다른 정치적 이득을 노려 볼모로 삼는 정략적 자세로는 야당에 희망은 없다. 이런 정도의 일은 이미 선진국에선 오래전부터 하고 있는 일이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과 이회창총재는 빨리 만나 이런 몇가지 여야협력의 틀을 합의하는 게 좋겠다.

국민은 정계개편을 둘러싼 '교통정리정치' 와 정쟁에 신물이 나 있다.

오늘의 국난상황은 여야협력.정국안정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경제는 더욱 나빠진다는데 실업자가 마침내 2백만명을 넘어 사회안정까지 위협하는 상황이 올 때까지 여야는 공멸의 길을 갈 것인가.

나라와 여야가 다 함께 사는 길을 이젠 시작해야 한다.

송진혁(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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