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204.아라리난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9면

제5장 길 끝에 있는 길

"시치미 잡아떼지 마십시오. 예천이 어딘지 몰라서 엉뚱한 말씀 하십니까?" "나는 견문도 없고 본데없는 놈이어서 예천이 안동 들머리에 있는 고을인지, 봉화 꼬리에 붙어 있는 고을인지 잘 모른다네. 그렇기도 하거니와, 한선생이 뭔가 작심한 것이 있고 사리분별이 분명한 사람이라면, 염치없이 우리한테 오라 가라 할 게 아니라, 한선생 몸소 달려와서 말 한마디 없이 야반도주한 내막을 해명하는 게 올바른 처신이라고 생각하는데, 어떻게 생각해?"

"옳은 말씀입니다. 이 나이가 되었다면, 제가 저지른 실수는 스스로 수습할 줄 알아야 사람 대접 받겠지요. 다만 저를 너무 기압주지 말아달라는 것입니다. " 이 말에 변씨는 또 다시 허파가 뒤집히고 말았다.

"이런 씨발. 도대체 올껴 안올껴? 우리가 시방 간첩들이야? 얼굴은 안 내밀고 전화로만 남의 허파 뒤집고 있는 까닭이 뭐여?" "가겠습니다.첫 차 타고 가겠습니다. "

"안 오기만 해봐라. 달려가서 다리를 확 분질러 놓을 테니깐. " "아버지. 너무 심하신 것 아닙니까?" 형식이가 면박까지 주었지만, 목구멍 끝까지 치밀어오르는 분통을 가만히 앉아서 달래기가 어려웠다.

무작정 양말을 찾아 신고 건넌방에서 자고 있는 태호를 들깨워 집을 나섰다.

잠시 그쳤던 비가 또 다시 익은 밤톨 떨어지듯 후두둑 땅을 치고 있었다.

장마가 끝났다는 예보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질금거리고 있었다.

피서철 경기를 노려서 구색 맞추기에 바빴던 상인들은 벌써부터 울상이었다.

예년 같았으면 새벽 두세시까지도 환하게 조명을 밝혔을 활어횟집들과 가게의 불빛들이 초저녁부터 불을 꺼버렸다.

그래서 바짓가랑이를 적시는 선착장 비바람은 더욱 을씨년스럽고 짜증났다.

호우주의보가 남발되면서 방파제에 발이 묶인 어선들이 물너울을 따라 하릴없이 너훌거리고 있었다.

모두가 오징어 채낚기 어선들이었다.

그 어선들을 타야 할 어부들은 하루 조업만 걸러도 빚은 산더미로 늘어가는 것이다.

흡사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영동식당의 불은 그때까지 켜져 있었다.

봉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지만, 승희와 묵호댁이 식탁에 맥주 한 병을 달랑 얹어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

두 여자 사이에 뭔가 심각한 대화가 오가고 있었다는 느낌이 진하게 들었지만, 이미 열어버린 문을 다시 닫고 돌아서기도 쑥스러웠다.

그 시각까지 가게에 불은 켜둔 까닭은 이웃 나들이를 간 봉환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철규로부터 전화가 걸려왔었다는 얘기는 태호의 입을 빌렸지만, 승희가 이렇다 할 내색을 않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변씨는 덤덤한 까닭을 꼬집어 묻진 않았다.

혈육이나 다름없는 사이들이지만, 사생활에 대해서는 아득바득 파고들기를 삼가는 것이 평지풍파를 막는 길이라는 것을 가르쳐준 사건들을 적지 않게 겪었기 때문이었다.

야밤에 가게를 찾아온 까닭도 자신의 그런 결심을 토로하고 일행의 합의를 얻어내자는 결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심 잘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들이 서로 남남처럼 썰렁한 사이가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서로를 너무 깊이 읽으려 들면, 이해보다는 앙금이 먼저 생기더라구요. 태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승희도 기다렸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돌아온 철규가 그 동안에 겪었던 일들을 스스로 공개하지 않는 이상, 죄인 다루듯 묻지 않기로 일찌감치 결정해버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봉환이가 돌아왔고, 그도 까탈 부리지 않고 동의했다.

그로선 승희와 묵호댁 사이에 겪고 있는 갈등을 일행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고 말끔히 씻어버릴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김주영 대하소설)

ADVERTISEMENT
ADVERTISEMENT